다빈치의 설계 원리는 격리와 위생이었다.
인구 밀집이 전염병 확산의 원인이라고 판단한 그는 밀라노 근교 10곳에 신도시를 건설해 밀라노 인구를 분산시키려 했다. 그는 신도시 건물과 도로를 직접 설계했다. 건물 주변에 연못을 만들어 병원균이 건물 내부로 유입되지 못하게 했다. 주거지는 2층에 두고 각 건물은 육교로 연결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건물 외벽에 설치, 유사시에 건물 내부 출입을 차단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위생도 중요시했다. 도로 폭을 넓혀 보행자간 접촉을 최소화하고, 도로를 기울게 설계해 빗물이 도로를 씻어내도록 했다. 흑사병이 다시 창궐하면 전염병 환자들의 건물 내부 진입을 신속히 차단하고, 생존자들은 전염병이 소멸할 때까지 2층 거주지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격리와 위생이라는 전염병 퇴치의 기본 개념은 19세기 후반에 비로소 정설로 인정받는다. 1840년 제멜바이스라는 의사가 손 씻기를 주장했다가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을 정도로 인류는 전염병에 무지했다. 사생아로 태어나 의료교육은커녕 정규교육도 받지 못한 다빈치가 어떻게 전염병의 본질을 이해했을까.
1348년 유럽에서 처음 발생한 흑사병은 중동에서 입항한 무역선의 쥐를 통해 전파되었다. 이슬람에 공포의 전염병을 전파한 것은 칭기즈 칸이다. 13세기 칭기즈 칸이 이슬람 제국을 멸망시킬 당시 몽골군은 전염병으로 사망한 시체를 성벽 안으로 던졌다. 최초의 생물학전이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면서 이슬람 선진 문물이 유럽에 전파된다. 르네상스 중심지 피렌체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다빈치가 전염병 지식을 얻을 수 있던 이유다.
다빈치 사후 500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전히 세계는 코로나19라는 현대판 흑사병의 공포에 빠져있다. 대중은 전염병 공포에 떨고 있고, 글로벌 경제는 완전히 멈췄다. 세월이 흘렀지만 격리와 위생이라는 전염병 대처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다빈치의 관점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대처는 미흡하다고 평가할 수 밖에 없다. 코로나바이러스 발생 초기에 정부는 중국발 입국자들에게 어떠한 제한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격리’의 원칙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최근 ‘마스크 대란’이 일어나면서 마스크 배급제가 실시된다. 정부는 두 번째 원칙인 ‘위생’도 실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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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예를 들어보자.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우리보다 중국에 더 가까운 대만은 발생 초기에 과감하게 중국발 입국을 차단하고, 마스크 수출을 금지했다. 3월 11일 현재 대만 확진자 수는 47명, 사망자는 1명이다. 대만 정부는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지지율은 11% 상승했다.
사실 정부의 근원적 문제는 정책의 일관성 결여이다. 초기 중국발 입국자를 차단하지 않은 것이 경제를 고려한 선택이라고 주장했지만, 지금은 중국 입국 차단이 실효성이 없다고 말을 바꿨다. 마스크가 최선의 수단이라고 말하더니, 마스크 대란이 일어나자 건강한 사람은 마스크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국가 정책의 진위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정부의 일관되지 못한 태도에 국민들이 극도의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다.
정책의 일관성 결여는 현 정권의 문제만이 아니다.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갈팡질팡하는 모습은 주기적으로 목격된다. 대한민국의 정책적 일관성 결여가 유독 심한 이유는 ‘전문가 천대’의 전통 때문이다. 정책 수립과 결정 과정에서 전문가 의견이 충실히 반영되었다면 정책이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대한민국 전문가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대한민국의 기적과도 같은 검진자 수는 검진 시스템의 우수성 때문이 아니다. 전문 인력의 희생이 컸다. 최근 코로나바이러스를 담당한 공무원 두 명이 과로사 했다. 위정자와 정치인들이 전문가를 휴지처럼 사용하는 국가에 미래가 있을까.
결국 다빈치의 이상적 도시는 구현되지 못했다. 통치자의 권력욕이 시민의 안전을 지키려는 전문적 견해보다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스포르차 공작은 군사적 야망이 컸다. 밀라노 인구를 10개 지역으로 분산시키면 전시에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빈치가 3년 동안 공들인 이상적 도시는 그렇게 휴지 조각이 되었다.
흑사병이 밀라노를 휩쓴 지 10년 후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밀라노를 침공한다. 스포르차 공작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프랑스의 군사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그는 포로 신세가 되어 프랑스에 압송되었고, 낯선 땅에서 쓸쓸히 최후를 맞았다. 하지만 밀라노 시민들은 아무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