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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세공장까지 흔드는 민노총에 눈물 흘리는 갖바치

김호준 기자I 2019.05.10 06:00:00

르포|공임 인상 투쟁에...파산 내몰린 성수 수제화거리
노조 공임 인상 투쟁, 작업 훼방
비용상승 부담에 공장 100곳 매물로
"소공인 권리는 누가 지켜주나"

8일 오후 서울 성동구 성수동 수제화거리. 제화 산업 침체와 공임 인상, 임대료 상승까지 겹쳐 일대가 급격히 쇠락하고 있다.(사진=김호준 기자)
[이데일리 김호준 기자]“내가 반세기하고도 5년을 더 구두를 만들었어. 나 포함해서 우리나라 족쟁이(제화공들이 스스로 지칭하는 말)들 세계 어디다 내놔도 안 꿀려. 그런데 이렇게 가면 이제 성수동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구두의 맥 자체가 끊어지는 거야”

56년 동안 구두를 만든 ‘서울시 구두 명장 1호’ 유홍식(71)씨는 최근 수제화거리의 분위기를 이 같이 표현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구두를 만들어 유명해진 유씨는 며칠 전에도 대통령이 신을 구두를 부탁받았다. 하지만 유씨의 표정은 근심으로 가득했다. 신발 산업 침체와 작년부터 본격화된 민주노총의 공임(工賃·제화공들이 신발 한 켤레를 만들 때마다 받는 비용)상승 압박, 제화공 퇴직금 소송으로 수제화거리 전체가 뒤숭숭 했기 때문이다. 성동제화협회에 따르면 현재 성수동 수제화거리에 매물로 나온 공장은 100여개에 달한다.

최근 구두보다 ‘힙플레이스’로 더 유명해진 서울 성수동 일대의 수제화거리의 활기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성수동 수제화거리는 도심형 소공인 집적지로 선정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수제화 생산단지다. 2013년 서울시 조사에 따르면 당시 성수동에는 수제화 생산 관련 업체 650여 개가 자리잡고 있었고, 종사자는 600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2017년 기준으로 업체수가 380여개로 줄었고, 지난해부터 1년여 사이에 무려 170여개가 줄어 지금은 200개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유씨가 운영하는 공장에서도 최근 일감이 줄어 함께 일하던 공장장과 처남이 그만뒀다. 유씨는 “원래 족쟁이들은 일제시대부터 여기저기 일감 찾아서 돌아다녔는데, 현실도 모르고 공임 올려 달라 퇴직금 달라하면 업체들 다 문 닫으란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8일 오후 성수동 수제화거리의 한 공장. 공장 관계자는 “일감이 줄고 경영난으로 도산하는 업체가 급격히 늘고 있다”고 말했다.(사진=김호준 기자)
이 같은 성수동 수제화거리의 붕괴는 작년부터 민주노총이 제화공들의 공임(工賃·신발 한켤레를 만들 때 받는 임금)에 개입하면서 시작됐다는 분석이다. 지난해부터 민노총의 개입으로 제화공들의 임금 투쟁이 잇따르면서 인건비 상승 압박을 견디지 못한 업체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과거 20여명의 조합원으로 출발한 민주노총 제화지부는 작년 4월 ‘탠디 투쟁’(민노총 제화지부가 주도해 봉천동 탠디 사업장에 벌인 파업)을 계기로 700여명으로 급격히 세를 늘렸다. 파업 후 회사 측은 제화공 공임을 켤레당 평균 6500원에서 7800원으로 20% 올렸다. 제화지부는 탠디 투쟁 이후 성수동 일대로 공임 인상 투쟁을 옮겨왔다. ‘탠디’와 ‘세라’, ‘소다’, ‘미소페’ 등 대형 제화업체의 하청공장에서부터 소규모 영세공장까지 공임 인상이 이어졌다. 평균 공임은 20~30% 가량 상승했다. 또 일을 그만둔 제화공들은 사측에 퇴직금을 요구했다. 제화공들은 돈이 없어 퇴직금을 주지 못한 업체들과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업체들은 신발산업이 침체기에 들어선 상황에서 노조가 공임 인상과 퇴직금 소송까지 유도하면서 수제화거리의 쇠락을 부추겼다고 지적한다. 박동희 성동제화협회장은 “노조가 공임 협상에 응하지 않는 작업장에 와서 훼방을 놓고 퇴직금 소송 때는 변호사까지 지원해줬다”며 “우리 같은 소상공인들 권리는 누가 지켜주냐”고 하소연했다.

8일 오후 서울 성동구 성수동 수제화거리. 제화 산업 침체와 공임 인상, 임대료 상승이 겹치며 폐업하는 가게들이 늘어나고 있다.(사진=김호준 기자)
결국 작년 12월에는 국내 3위 제화업체 미소페가 중국으로 공장 이전을 결정했다. 또한 현재 퇴직금 지급 소송이 진행 중인 38개 공장 역시 잇따라 패소하면서 영업 중단과 폐업을 준비 중이다. 박 회장은 “지금 가동 중인 공장 100여개도 매물로 나와 있다”며 “이렇게 가면 성수동은 집적지로서 기능을 완전히 잃게 된다”고 우려했다.

성수동 일대가 인기를 얻으면서 건물 임대료가 점차 상승하고 있는 점도 업체들의 경영난을 가중시켰다. 성수동에서 22년 동안 수제화 매장을 운영한 김모(55)씨는 “주말만 되면 사람들이 들끓는데 하루가 다르게 가게가 망하고 새로 들어선다”며 “겨우 밥 벌어먹고 사는 공장이나 제화공들은 성수동에서 버틸 수가 없다”고 말했다.

민주노총도 이같은 업체들의 상황을 인지하고 최근 공임 인상보다 제화공 처우개선에 초점을 맞추려고 하지만 시기를 놓쳐버린 모습이다. 정기만 민주노총 제화지부장은 “아직 공임비가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다”면서도 “지금 하청업체와 수제화단지 전체가 힘들기 때문에 유통수수료를 낮추고 특수고용직 신분인 제화공들에게 4대 보험을 제공하는 등 원청과 협력업체, 노동자가 상생하는 쪽으로 활동 목표를 잡고 있다”고 말했다.

8일 오후 서울 성동구 성수동 수제화거리. 제화 산업 침체와 공임 인상, 임대료 상승까지 겹쳐 일대가 급격히 쇠락하고 있다.(사진=김호준 기자)
상황이 이처럼 최악으로 향하고 있지만 정부와 서울시는 아직까지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주무부처인 중소기업벤처부 관계자는 “전반적으로 수제화거리가 어려운 상황은 인지하고 있다”면서도 “다만 전체 소공인 지원사업의 틀 안에서 기술이나 판로 등을 같이 지원하는 방안 밖에 없어 수제화거리만을 위한 지원책을 내기엔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관계자 역시 “구체적으로 지원 방안은 정해진 것이 없다”면서 “서울시 차원에서도 판로 개척을 위한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언급했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정책을 논의하는 국회 ‘을지로위원회’가 10일 수제화 산업 지원 방안을 논의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확실한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당정청이 효과적인 지원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된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클러스터화 된 성수동 수제화거리의 경우, 업종 특성에 맞게 공동 비용절감을 위한 정부의 확실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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