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성평등 지수 상위권 스웨덴의 '미투'는 무엇이 달랐나

장병호 기자I 2018.10.08 06:00:00

수잔나 딜버 스웨덴공연예술연맹 의장
문화예술계 '미투' 포럼 참석차 방한
"스웨덴 '미투'는 익명성 바탕 문제 접근
연대로 위계적 사회 구조 변화 이끌어야"

수잔나 딜버 스웨덴 공연예술연맹 배우 부문 이사회 의장이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이음센터에서 기자들과 만나 스웨덴의 ‘미투’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권력과 위계에 의한 성폭력 문제를 폭로하는 ‘미투’(MeToo·성폭력피해고발운동) 운동은 세계에서 성평등 지수가 높은 것으로 알려진 스웨덴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노벨문학상을 선정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종신위원인 카타리나 프로스텐손의 남편인 사진작가 장클로드 아르노가 ‘미투’ 운동으로 논란에 휘말리면서 올해 수상자 발표를 취소하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다.

그러나 스웨덴의 ‘미투’ 운동은 한국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이음센터에서 만난 수잔나 딜버 스웨덴 공연예술연맹 배우 부문 이사회 의장은 “스웨덴의 ‘미투’ 운동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실명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와 달랐다”며 “개개인에게 책임을 묻기보다 구조적인 문제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이슈화보다 메시지 전달 방식 고민”

딜버 의장은 스웨덴의 ‘미투’ 운동을 이끌고 있는 활동가다. 스톡홀름 예술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한 뒤 1998년부터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딜버 의장에 따르면 스웨덴의 ‘미투’ 운동도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이 도화선이 됐다. 배우는 물론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익명으로 공유하기 시작했다.

스웨덴의 ‘미투’ 운동이 익명으로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연대’의 힘이었다. 딜버 의장은 “배우들은 언론의 손을 빌리기보다 동료와의 연대를 선택했다”며 “대화와 연대를 통해 48시간도 되지 않아 500여 명의 배우가 ‘미투’ 운동과 관련한 서명에 동참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슈화보다 우리의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전하는지가 중요했다”며 익명성을 유지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성평등 지수가 높은 스웨덴에는 차별을 금지하고 평등을 추구하는 다양한 법과 제도가 마련돼 있다. 그럼에도 성폭력이 만연하다는 사실이 ‘미투’ 운동에 더 큰 힘을 실었다. 딜버 의장은 “법과 제도가 있음에도 성폭력이 계속 이뤄져 왔고 이를 묵인해왔다는 점에서 그동안의 좌절감이 폭발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반발도 없지 않았다. 극우 세력이 ‘미투’ 운동에 항의하는 등 백래시(사회·정치적 변화에 대해 나타나는 반발 심리 및 행동을 이르는 말)가 나타났다. 딜버 의장은 “특권을 갖고 있던 계층에게 평등은 자신이 갖고 있어야 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며 “변화는 불확실성을 수반하기 때문에 보수 성향의 사람들은 불안함에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찾게 된다”고 분석했다.

그는 “‘미투’ 운동의 영향으로 스웨덴은 올해 7월 1일부터 ‘명시적 동의 없는 성관계는 강간’이라는 내용을 골자로 한 ‘파타(fatta)법’을 새롭게 발효했다”며 “그러나 가부장제 등 위계에 의한 뿌리가 깊은 문제이기 때문에 사회 전반의 인식 개선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수잔나 딜버 스웨덴 공연예술연맹 배우 부문 이사회 의장이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이음센터에서 기자들과 만나 스웨덴의 ‘미투’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한국의 연극연출가 박영희의 손을 잡고 있다.


◇“‘미투’는 위계에 대한 문제제기”

딜버 의장은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부산문화예술계반성폭력연대,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와 함께 지난 5일부터 7일까지 서울과 부산에서 진행한 문화예술계 ‘미투’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지난 2월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 당시 연극연출가 오태석의 성폭력을 폭로한 연극연출가 박영희가 딜버 의장의 방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에서 일어난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은 해외 공연계와의 연대로 이어졌다. 지난 5월에는 오태석 연출이 대표로 있는 극단 목화의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만 공연이 취소됐다. 대만 공연 프로듀서 란 베이츠를 통한 대만 공연계와의 연대가 있었다. 딜버 의장의 방한도 휴식을 위해 스웨덴을 찾은 박 연출을 통해 이뤄졌다.

박 연출은 “인권과 복지가 잘 돼 있다는 스웨덴에서도 ‘미투’ 운동이 있었다는 이야기에 무척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는 개개인의 문제 제기로 진행됐던 ‘미투’ 운동이 스웨덴에서는 나이를 불문한 여러 세대의 ‘연대’를 바탕으로 이뤄졌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며 “여러 명이 동참했기에 더욱 진정성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미투’ 운동이 일어난지 약 8개월이 지난 지금도 변화는 이어지고 있다. 딜버 의장은 “‘미투’ 운동에는 내가 나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내 뒤의 세대, 또는 미처 말하지 못하고 있는 선배나 동료도 같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며 “앞으로도 연대를 통해 ‘미투’ 운동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사회 구조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연출은 “아직까지 ‘미투’ 운동의 성과를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이른 감이 있다”며 “우리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가부장제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됐다는 것, 결국 뿌리 깊은 위력에 대한 문제를 던졌다는 것이 ‘미투’ 운동의 의미라고 본다”고 말했다.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