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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안승찬 기자] 대통령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지난해 2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새벽 3시 자신의 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곤 다짜고짜 ‘강한 달러가 좋은 거냐, 약한 달러가 좋은 거냐’고 물었다.
하필 전화를 받은 상대가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이던 마이클 플린이었다. 군인 출신의 군사전문가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 무척 당황했다. 그리곤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저는 잘 모르니, 경제학자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맨큐의 경제학’으로 유명한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다른 건 몰라도 (잘 모른다는) 플린의 답이 아주 훌륭했다”면서 “강달러냐 약달러냐는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이득을 주면 다른 누군가가 손해를 입는 문제”라고 말했다.
◇“강달러냐 약달러냐는 좋고 나쁨 문제 아냐”
맨큐 교수의 말처럼 통화 가치의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강한 달러는 전 세계 기축통화로의 달러의 지위를 공고하게 만드는 힘이다. 가격이 불안하면 안정적인 통화가 될 수 없다. 빚으로 정부를 운영하는 미국 입장에서는 달러 값이 받쳐줘야 채권을 발행하기도 쉽다.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달러채권을 팔아 해외에서 돈을 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러화 가치가 높아지면 미국의 수출기업은 곤혹스럽다. 달러 가치가 낮아져야 해외에 싼값에 팔 수 있고, 같은 가격에 수출해도 달러로 바꿨을 때 수출기업의 이익이 많아진다. 달러의 상대적인 가치가 떨어져야 사업환경이 좋아진다. 그래서 미국은 강한 달러와 약한 달러를 동시에 원하는 모순적인 위치에 있다. 새벽 3시에 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질문에는 달러 방향에 대한 그의 고민이 묻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새 방향은 달러화 약세로 뚜렷해졌다. 미국의 곳간을 책임지는 재무장관 스티븐 므누신이 올해 초 공개적으로 “약달러가 좋다”고 폭탄 선언하며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실제로도 달러는 가파른 속도로 떨어졌다. 주요 6개국 통화와 비교한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는 기준금리 인상에도 지난해 10.33% 하락했다. 14년 만에 가장 큰 폭의 하락이다.
노골적인 달러화 약세 정책은 여전하다. 백악관의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에 새로 지명된 래리 커들로도 최근 달러 약세를 용인하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는 최근 CNBC와의 인터뷰에서 달러인덱스의 90 언저리를 가리키며 “난 이 정도가 좋다”고 말했다. 이미 작년보다 10% 이상 떨어진 달러 가치를 앞으로도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말이다. 그가 말하는 “안정적이고 강한 달러”는 지금 수준에서 더 값이 올라가지 않고 계속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백악관 NEC 위원장 “약달러, 이 정도가 좋아”
트럼프 대통령이 달러화 약세를 밀어붙이지만, 생각보다 효과가 없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의 수출 상품의 경우 저가품이 아니고 가격에 대한 민감도가 낮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반면 달러화 약세는 미국의 수입 가격을 높이지만, 마땅한 대체 미국 제품이 없으면 수입 감소 효과가 크지 않다. 결국 달러 약세가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를 더 심화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달러화 약세 속에서도 지난해 미국의 무역적자는 작년보다 10% 이상 늘어났다. 달러화 약세가 곧바로 무역적자 감소로 이어지는 건 아닌 셈이다.
홍익희 세종대 교수는 “미국의 제조업 비중은 국내총생산(GDP)의 10% 남짓한 국가여서 환율이 미국 상품의 수출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력은 극히 제한적”이라며 “환율이 미국의 무역적자를 크게 호전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위적인 달러화 약세는 주변국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통화정책에 인위적으로 개입하지 않기로 한 지난해 10월 국제사회 합의를 깨고 있다”고 대놓고 불만을 제기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효과도 미비하고 통화 전쟁을 유발할 수 있는 달러화 약세에 기대는 이유는 정치적 효과 때문이다. 쇠락한 미국의 제조업 지역인 ‘러스트벨트(Rust belt)’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다. 러스트 벨트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남들이 뭐라 건 트럼프 대통령에겐 러스트벨트가 정책의 최우선 고려대상이다.
가뜩이나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적인 코너에 몰려 있다. 지지율은 답보 상태고, 여당인 공화당의 지지율은 민주당과의 격차가 두 자릿수 격차로 뒤쳐졌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펜실베이니아주 연방하원의원 보궐선거에서 직접 유세에 나서며 지원했지만, 공화당은 또 패배했다. 지난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20%포인트의 표차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던 대표적인 러스트벨트 지역에서의 패배다.
트럼프 대통령은 더 강한 걸 내놓아야 할 판이다. 그는 지난 8일 수입 철강과 알루미늄에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는 자리에도 러스트벨트 철강 근로자들을 초청했다. 작업모를 쓴 이들을 병풍 삼아 트럼프 대통령은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내가 약속을 지켰다”고 강조했다. 달러화 약세는 그들에게 주는 또 다른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