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롄화치 청사가 다른 중국 내 독립운동 유적들과 달리 원형 그대로 보전되는 데는 독립운동가 이달(李達) 선생의 딸인 이소심(李素心·76)여사의 공이 컸다. 이 여사는 광복군에 복무 중이던 부친이 병환으로 세상을 뜬 뒤 중국인 어머니와 충칭시에서 거주했다. 이 여사는 청사가 철거위기에 처하자 한·중 양국 정부를 찾아다니며 청사 보존을 호소해 복원사업을 이끌어냈다.
1919년 세워진 상하이 임시정부 외에 충칭시에도 임시정부 청사가 존재한다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낯선 사실이다. 1919년 상하이에서 처음 수립한 임시정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항저우(抗州), 진장(鎭江), 광저우(廣州)를 옮겨다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중국 내 독립운동가들의 요람이었던 충칭시에 둥지를 틀었다. 충칭시는 장준하, 김준엽 등 일본군에 징집된 학도병이 탈출해 광복군에 입대한 곳이기도 하다.
임시정부를 이끌던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해 각료들은 충칭시에서 1940년 9월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해 일제와 무력으로 맞서 싸울 준비를 시작했다. 1941년 12월 10일에는 일제에 선전포고를 했다. 광복군은 국내에서 일제와 군사적으로 맞서 싸울 기회를 찾았지만 일제의 항복선언으로 무산된 채 광복을 맞았다.
이곳을 찾은 한국인 방문객은 벅찬 감동을 담아 방명록을 채웠다. 방문객들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태동했던 역사적인 장소에 와서 감개무량합니다’ ‘(우리) 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자유 독립국을 위해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잊지 않고 부끄럽지 않게 살겠습니다’ 등 글을 적어 조국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독립지사들의 뜻을 기렸다.
이른 아침 충칭시 임시정부 청사를 찾은 문상수(38)씨는 “중국에 있는 여러 독립운동 유적지와 관광지를 둘러봤다. 충칭 임시정부 청사에는 처음 와 봤다”며 “교과서에 나오는 역사적 사실은 간략한데 여기 오니까 예전 임시정부 요인이 어떻게 활동했었는지 역사적 사실을 좀 더 생생하게 알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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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의사는 거사 이후 일본으로 호송돼 총살형을 당했다. 서거할 당시 나이는 25세에 불과했다. 윤 의사에게는 1962년 대한민국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당시 중국 국민당을 이끌던 장제스(蔣介石) 전 타이완 총통이 윤 의사의 의거 소식을 접하고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고 격찬하며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라고 지시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후 임시정부가 국민당 정부와 손잡고 항일운동을 펼치게 되면서 광복군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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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의사 기념관에서 만난 박모(40·여)씨는 “중국에 이런 (독립운동) 장소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앞으로 찾아올 방문객도 우리나라 역사를 알고 이곳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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