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엔 구글이 없다

조선일보 기자I 2006.12.26 08:32:02

中企, 93년후 대기업된 건 0.01%
‘삼성·현대 성장 신화’ 이젠 꿈인가

[조선일보 제공] 1997년 9월, 전대협 의장 출신 이철상(당시 30세)씨가 서울대 공대 박사들과 함께 휴대폰 전지업체 바이어블코리아(그후 VK로 개명)를 설립했다.

같은 해 미국에선 스탠퍼드대 대학원생 래리 페이지(당시 25세)와 세르게이 브린(당시 24세)이 자신들이 개발한 인터넷 검색엔진을 팔기 위해 부지런히 뛰고 있었고 이듬해 구글을 창업한다.

한미 양국의 벤처신화를 상징하는 두 회사의 출발은 이처럼 비슷했으나, 그후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렸다. 구글은 디지털 경제의 최강자로 부상하면서 직원 8000명에 IT기업 중 시가총액 세계 3위(150조원)의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바이어블코리아도 VK로 이름을 바꾼 뒤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연간 매출 3800억원에 30여개국 해외 지사를 거느린 국내 4위 휴대폰 업체로 급부상하며 대기업군(群) 진입에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VK는 세계 시장에서 경쟁자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창업 9년째인 올해 7월 부도가 나며 결국 증시에서 퇴출당했다.

‘대기업 진입 신화’가 사라지고 있다. 과거 한국경제는 삼성·현대·LG·대우처럼 중소기업이 단기간에 급성장하는 성공 사례가 끊임없이 등장하면서 성장과 활력을 견인해왔다. 미국에서도 이베이며 아마존, 야후처럼 창고에서 탄생한 벤처기업이 거대기업으로 성장하는 성공신화가 자주 등장한다. 반면 한국에선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크는 사례가 갈수록 희귀해지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삼보컴퓨터·메디슨·세원텔레콤 등 가능성이 엿보였던 중견기업들이 대부분 문턱에서 탈락했고, 최근엔 대기업 반열에 올랐던 팬택마저 무너지고 말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분석 결과, 1993년 5만6472개 중소기업 중 10년 후인 2003년에 300인 이상 업체로 성장한 곳은 75개(0.13%)에 불과했다. 500인 이상 기업으로 성장한 기업은 겨우 8개(0.01%)뿐이었다. 1만개 창업해야 1곳만이 종업원 500인 이상의 큰 기업으로 성장한다는 뜻이다.

조덕희 산업연구원 박사는 “1980년대 이후 재벌 계열사나 민영화된 공기업 외에 독립된 창업기업이 삼성전자처럼 글로벌시장에서 인정받는 대기업으로 성공한 사례가 없다”며 “한국경제의 꿈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본지가 상장기업을 분석해 보았더니 2002년말 종업원 1000명 미만 상장기업 1191개 중 현재 종업원 1000명 이상으로 성장한 곳은 웅진코웨이·엔씨소프트·신도리코·NHN·하나투어·피앤텔·종근당 등 14개(1.2%)에 불과했다.

매출액까지 3000억원을 넘긴 곳은 5곳(NHN·태산엘시디·디에스엘시디·신도리코·웅진코웨이)이었고, 매출 1조원을 돌파한 곳은 웅진코웨이 1곳에 불과했다. 또 2002년말 종업원 300명 미만 중소기업에서 현재 1000명 이상으로 큰 기업은 NHN뿐이었다.

김주훈 KDI박사는 “전문 경영인층을 제대로 키워내지 못했고, 신생 유망기업에 대한 자금·인력 등의 자원 투입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월등히 낮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존 대기업들이 시장을 독과점적으로 장악하고 있어 중소기업의 신규 진입이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경제평론가 앤디 시에(전 모건스탠리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성장하려면 삼성전자·현대차·포스코 같은 글로벌 대기업을 10개 이상 더 키워야 한다”(9월2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한국은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클 수 있다는 꿈 자체가 사라진 나라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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