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는 고공행진 중인 대본집 수요를 영상 시청자들의 팬덤층 유입과 소장 욕구의 반영에서 찾는다. 단순히 책이 아닌 일종의 굿즈(goods·기획상품)로 인식해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 주말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만난 직장인 박향미(36)씨의 손에는 영화 ‘헤어질 결심’ 각본집이 들려 있었다. 박씨는 “대사와 지문을 글로 읽다보면 영상으로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인물의 감정과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며 “좋아하는 작품을 쉽게 꺼낼 볼 수 있고, 영화의 여운을 간직할 수 있어 대본집을 사서 읽는 편”이라고 말했다.
대본집(각본집)은 출판 업계 한 장르가 됐다. 온라인 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최근 3년간 1~7월 드라마 대본·영화 각본 출간 수는 2020년 14종, 2021년 48종, 2022년 58종으로 늘었다. 전년 동기 대비 판매 증가율도 2020년 93.2%, 2021년 54.5%, 2022년 121.9%를 기록했다.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를 좌우할 정도로 판매도 쏠쏠하다. 그중 ‘N차 관람’ 열풍을 이끈 영화 ‘헤어질 결심’ 각본집(을유문화사)의 돌풍이 눈에 띈다. 지난 7월19일 예약판매 시작부터 예스24, 알라딘의 주간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후 3주 연속 자리를 지켰다. 7월28일 정식 출간 후에는 일주일 만에 11쇄를 찍었다. 영화 누적 관객 수(5일 기준 187만1422명) 대비 많이 팔린 셈이다.
출판사 관계자들은 ‘헤어질 결심’ 각본집 인기의 배경을 대본 자체 ‘텍스트의 힘’이라고 해석한다. 박찬욱 감독과 정서경 작가가 공동 집필한 영화 특유의 문어체 대사의 말 맛이 인기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영화 속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마침내”, “운명하셨습니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같은 송서래(탕웨이 분)와 장해준(박해일 분)의 대사는 아직까지 수많은 유행어를 낳고 있다.
위다혜 교보문고 예술MD(상품기획)는 “영화 각본이 선사하는 즐거움은 영화 속 명대사들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촬영과 편집을 마친 최종 결과물과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라며 “헤어질 결심은 이 확인의 즐거움이 각별한 작품이다. 서래의 한국어 대사는 활자로 읽었을 때 매력이 더해지고, 해준 대사 역시 단어 선정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천천히 톺아볼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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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5일께 공식 출간 예정인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대본집 1·2권(김영사)의 열풍은 드라마의 인기만큼이나 뜨겁다. 종방 뒤 지난달 11일부터 예약 판매를 시작했는데, 하루만에 5000부 이상이 팔려나갔다. 올 초 종방한 SBS ‘그해 우리는’ 대본집 1·2권(김영사)은 10만부 넘게 팔린 것으로 알려진다. tvN ‘우리들의 블루스’ 대본집(북로그컴퍼니)은 노희경 작가의 주옥같은 대사로 꾸준히 팔린다. 국내 첫 판매용 대본집은 노 작가가 쓴 ‘그들이 사는 세상’이다. 2009년 북로그컴퍼니에서 처음 출간했다.
이밖에도 ‘갯마을 차차차’(북로그컴퍼니), ‘옷소매 붉은 끝동’(청어람),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21세기북스), ‘서른, 아홉’(아르테) 등의 대본집이 경쟁적으로 출간되고 있다.
지난 5월 종방한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대본집을 기다리는 독자들도 많다. ‘추앙’이라는 명대사에 소셜 커뮤니티(SNS)에서는 대본집 출간을 요청하는 글들이 쇄도하고 있다.
출판계 대본집 바람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교보문고는 “영화 드라마 관련 도서는 콘텐츠 팬덤에 대한 일종의 굿즈”라며 “원작 소설, 원작 만화가 드라마, 영화화되면서 판매량이 상승하는 것이 기존의 전형적인 패턴이었다면 코로나19 이후에는 대본집, 포토에세이까지 다양하게 파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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