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세포가 대장을 뚫고 나가 복막 전이까지 진행된 상태였어요. 수술이 불가능했죠. 수술해도 예후가 너무 나쁘니 집에 가서 맛있는 것 먹고 여행이나 후회 없이 다니라고 하더라고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죠. 과연 내가 2014년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있을까 싶더군요.”
◇하이펙 치료 환자 생존기간 62.7개월
지인의 소개를 받고 대장항문외과 권위자인 백승혁 교수를 찾아가면서도 몇 번이나 오진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모든 게 없던 일이 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백 교수는 “대장암 4기라도 새로운 치료법으로 생존율을 높일 수 있으니, 포기해선 안 된다”며 용기를 북돋워줬다. 실낱같은 희망이 보이던 순간이었다.
백승혁 강남세브란스병원 대장항문외과 교수가 2014년부터 시행해온 ‘하이펙(HIPEC, Hyperthermic Intra-Peritoneal Chemotherapy)’은 수술조차 받기 어려운 복막 전이 4기 대장암 환자의 마지막 희망이다. 수술로 모든 암 부위를 제거한 후 41~43도의 항암제를 복강 내로 순환시켜 복막 내 남아 있는 암종을 치료한다. 기존의 전신 항암제가 복막에 흡수되기 어렵다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크기의 암종은 수술로 제거하고, 이후 항암제를 복강 내에 투여해 남아 있는 미세한 암종에 항암제가 직접 투과될 수 있도록 고안된 치료법이다.
또한 41~43도의 온도에서는 약물의 흡수율이 올라가고 종양제거율이 높아지기 때문에 HIPEC은 실온에서의 치료보다 효과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4기 다발성 전이암은 수술을 하지 않고 완화 목적의 항암제나 방사선치료만 한다. 일부에서는 4기암을 말기암이라 부르며 일체의 치료를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하며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하이펙은 수술을 통해 근치적 치료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4기 암환자에게 마지막 희망이 되고 있다.
실제로 2009년 미국임상종양학회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기존의 항암요법을 받은 환자가 23.9개월의 생존 기간을 보인데 비해 하이펙 치료를 받은 환자는 62.7개월로 약 40개월 더 긴 생존 기간을 보였다. 무질병 생존 기간에서도 기존 치료가 12.6개월인데 비해 하이펙 환자는 22.2개월의 좋은 결과를 보였다.
◇백승혁 교수, 382회 수술 집도
백 교수는 2013년 미국 워싱턴 암 연구소에서 하이펙 연수를 받았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개념도 생소하던 하이펙을 연수하게 된 계기에 대해 백 교수는 “당시 국제적으로도 최고 수준의 로봇 최소 침습 수술의 전문가였지만 암이 발병 부위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서 증식하는 암종증의 경우 수술이 불가능한 환자들에게 거의 무용지물이라는 것에 깊은 회의를 느꼈다. 이런 환자들의 생존율을 높일 수 있는 치료법을 무던히 고민했었다”고 말했다. 2014년 7월 처음으로 하이펙 수술을 시행한 백승혁 교수는 2018년 말 300례를 달성했고 현재까지 382례의 수술을 집도했다.
국내에서는 2013년 신의료기술로 허가돼 대장암, 가성점액성낭종증, 위암, 난소암 등의 복막전이 치료에 사용되고 있으나 아직 널리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수술 중에 항암요법이 시행되기 때문에 기존 암 수술에 비해 외과의사의 노력과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더 많은 의료진이 참여해야 하는 부담 때문이다. 또 효과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육안으로 보이는 암종을 수술로 모두 제거해야 하기 때문에 수술의 난도가 높고 수술 후 관리도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강남세브란스병원 대장암센터는 대장항문외과, 소화기내과, 종양내과, 방사선종양학과, 영상의학과 등이 모여 다학제진료를 시행해 최적의 치료 방법을 결정하고 하이펙 수술이 결정된 경우 효과적인 종양 감축, 적출술을 위해 간외과, 흉부외과, 비뇨의학과 등 관련 진료과와의 협진뿐만 아니라 함께 수술까지 시행하는 ‘융합수술’ 체계를 갖추고 있다.
백 교수는 4기 대장암 및 암종증의 성공적인 치료를 위해 의료진의 실력과 잘 갖춰진 시스템, 환자의 믿음과 의지를 강조한다. 백 교수는 “하이펙은 치료의 끝이 아니고 시작이다. 수술 후에도 항암치료 과정이 남아 있고 재발이나 전이가 생기지 않는지 꾸준히 검사해야 한다. 또 재발이나 전이가 생겼다고 해도 포기하지 말고 그에 맞춰 최선의 치료를 한다면 결국 암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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