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끝나지 않은 IMF 악몽...보루네오·현대페인트의 절규

유근일 기자I 2016.04.04 07:00:00

법정관리 벗어나니 무자본 M&A 세력에 경영권 넘어가
장기불황 몰려온다...제조업종 사전적 구조조정 필요해

[이데일리 유근일 기자] “얼마 전 만난 부산의 한 대리점주가 눈물을 보이며 ‘회사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느냐’고 말할 때는 제 가슴도 미어지는 듯 했습니다. 최근 쑥쑥 성장하고 있는 한샘(009240)을 바라보면 한 때는 우리도 저런 때가 있었지 하며 한숨이 나오곤 합니다. 1980년대까지도 보루네오(004740)가구 대리점을 한다고 하면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는 데 안타깝습니다.”

올해로 보루네오가구에서 30여년을 재직해 온 이두형 노조위원장의 회상이다. 이 위원장은 지난달 31일 최대주주와 반대측 주주가 경영권 분쟁을 일단락지었지만 여전히 걱정되는 부분이 많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국제통화기금(IMF)발 외환위기 이전에 연 2000억원에 달했던 회사 매출은 지난해 438억원으로 쪼그라들었고, 3000여명의 생산 직원은 현재 70여명까지 줄었다. 노조 바람대로 실내건축자재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예림임업이 경영권을 쥐게 되면서 재도약의 발판을 기대할 수 있게 됐지만 과거 영광은 이미 먼 이야기가 됐다.

이 위원장은 “IMF 이후 그간 사업 본질과는 거리가 먼 경영진들만 회사를 거쳐갔다”며 “과거 캠코(자산관리공사)가 공적자금 회수를 위해 서둘러 경영 정상화를 꾀하면서 본업과는 거리가 먼 단순 금융투자자에게 지분을 넘기면서 모든 것이 잘못되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보루네오가구는 2001년 캠코의 기업구조조정 자회사인 캠코SG인베스트먼트에 인수되면서 법정관리를 졸업했다. 캠코와 자회사가 회사의 최대주주로 있던 16년간 GS그룹, 삼익악기 등 여러 유력 업체들이 새 주인으로 거론됐다. 하지만 결국 회사가격을 높게 매겨 준 무자본 M&A(인수합병) 세력에게 넘어갔다. 당시 M&A 전문가였던 정 모씨는 캠코의 전 직원을 통해 입찰 참가 예상 업체 명단 등 정보를 빼내 사채업자들에게 빌린 돈으로 회사를 인수해 실형 선고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10여년이 걸려 정상화시킨 기업은 결국 무리한 신규 사업확장으로 2013년 다시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말았다. 지난해 법정관리 졸업 이후에도 줄곧 이어졌던 경영권 분쟁은 이제야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었다.

자료=금융감독원
지난달 29일부터 상장 폐지 절차에 들어간 현대페인트(011720)도 마찬가지 사례다.

이 회사는 IMF 이후 부도를 겪으면서 2002년 기업구조조정조합이 최대주주의 자리에 올랐다. 회사가 법원의 화의 신청을 마치고 조합을 해산하자 사채 시장에서 돈을 빌린 무자본 M&A 세력들이 회사의 주인으로 올라섰다. 새로운 경영진들은 기존 회사의 사업과는 무관한 신규사업을 펼치며 주가를 끌어올리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전 대표이사가 주가 조작으로 구속됐다.

현대페인트 노조 관계자는 “회사의 주인이 주주라고 하지만 주주라는 사람들은 회사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 없이 주가 부양으로 돈 벌 궁리만 해왔다”며 “이제는 주주라는 말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난다”고 전했다. 노조가 상장 폐지를 바라는 것 역시 회사의 미래에 관심이 없는 주주들에게 더이상 휘둘릴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처럼 IMF 이후 혹독한 법정관리를 거쳐 경영 정상화를 이룬 중소기업들 가운데 채권단의 재매각 과정에서 시련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채권단들은 주로 경영 정상화를 유지시켜 줄 새 주인을 찾아주기보다는 비싼 가격으로 채권을 회수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 데 골몰하기 때문이다. 과거 보루네오가구의 법정관리 이후 진행됐던 매각 협상 과정에서도 채권단은 매각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3차례나 협상을 무산시키기도 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교수는 “정부 소유의 기관인 채권단은 민간 채권단과는 달리 강력한 채권 회수책을 선호할 수 밖에 없다”며 “그 결과 구조조정의 본래의 목적이나 정책금융기관 본래의 역할을 망각하고 눈 앞에 실적에만 급급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고강도의 구조조정을 거쳐 경영 정상화를 이룬다 하더라도 시장의 수요는 많지 않다. 한 가구업계 관계자는 “과거 보루네오가 매물로 나왔을 당시에도 끊임없이 동종 업계에서 인수하게 해야야 한다는 책임론이 대두됐지만 묵살됐다”고 강조했다.

레미콘·시멘트 업계에서도 이런 경향은 두드러진다. 법정관리를 마치고 최근 사모펀드(PEF)에 인수된 한 시멘트 업체 관계자는 “당장은 동종업계에 인수되지 않아 추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갈 가능성이 줄어 안심”이라면서도 “통일이 되지 않는다면 시멘트 업종의 업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 뻔한데 사모펀드가 과연 어떤 회사에 재매각할 지 걱정스럽다”고 전했다.

이렇다 보니 중소기업들은 무자본 M&A의 목표가 되곤 한다. 고강도의 구조조정을 거친 중소기업들은 사채 시장에서 돈을 빌려 회사를 사들일 수 있을 정도로 회사의 재무상태가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IB업계 관계자는 “부실채권(NPL)에 투자하는 운용사 입장에서는 수익을 최우선시 여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며 “비싼 가격으로 바이아웃(재매각)할 수 있다면 상대방이 사업을 제대로 할 지 어떨 지 여부에 대해서는 크게 고려하지 않는 편”이라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장기 불황에 대비해 이 같은 부작용을 막을 수 있도록 선제적 구제조정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기업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일명 원샷법)’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김광석 삼정KPMG 수석연구원은 “주요 기업들 사이에서는 원샷법 도입으로 채권단으로부터 압박을 받아 조급한 흡수합병이 진행될 수 있다”며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신성장 동력사업 및 미래 유망산업 리스트 등을 제시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각 기업마다 현재의 사업 구조 및 핵심경쟁력을 파악해 맞춤형 유망사업을 매칭시켜주는 역할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 관련기사 ◀
☞한샘, 중국 법인 취득 예정일 1개월 연기
☞한샘, 4월 '침대+매트리스 동시 구매 할인 이벤트' 실시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