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함정선 김상윤 기자] “러시아 현지 기업인들도 ‘침공’을 카드로 쓸 때 얻을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해 반응은 오히려 평온했다. 그러나 돈바스 지역 친러 세력에 대한 독립을 러시아가 승인한 것을 보자, 실제 침공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듯 하다.”
러시아 현지에서 근무하다 최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긴장이 고조하며 귀국한 한 기업인의 말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 대한 침공 가능성이 내비치며 우리 기업들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이 러시아에 대한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실제로 벌어질 수 있다는 상황을 가정해서다.
우리 기업들은 직접적으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부터 수입하는 에너지, 원자재와 희귀광물 등 수급에 차질을 빚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간접적으로는 두 나라 간 전쟁에 따른 국제적인 에너지, 원자재 수급 불안과 가격 폭등 등에 따른 전방위적 타격이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반도체 소재 수급 차질 생길라 ‘주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업계는 특수가스 수급 문제를 주시하고 있다.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희귀가스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수입 의존도가 상당해서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수입된 네온 중 우크라이나 비중은 23%, 러시아 비중은 5.3%다. 2020년에는 우크라이나 수입 비중이 52.5%로 1위였다. 네온은 실리콘 웨이퍼에 미세회로를 새기는 반도체 노광공정에 사용된다.
반도체 식각공정(회로 패턴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깎는 것)에 사용하는 크립톤의 우크라이나 수입 비중은 30.7%, 러시아 비중은 17.5%에 달한다. 양국의 충돌이 가시화될 경우 원자재 수급에 어려움을 겪어 생산 차질을 빚을 수 있다.
물론 우리 기업들은 일본의 수출규제 교훈으로 희귀 가스 재고를 상당후 확보한 상황이다. 하지만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희귀가스 가격이 급등해 생산 차질이 벌어질 리스크가 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불거진 2015년 우크라이나 분쟁 당시에는 네온 가격이 10배 이상 치솟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원자재 수급 다변화로 상당수 재료를 확보해 당장 수급난은 없을 것”이라면서도 “갈등 장기화시 원자재 가격이 지속적으로 급등하는 리스크가 있어 면밀히 가격 변동성 등을 체크하고 있다”고 말했다.
◇에너지부터 원자재까지…전방위 타격 올까
기업들의 또다른 우려는 석유와 석탄, 천연가스와 광물 등 에너지와 원자재의 수급차질과 가격급등에 따른 혼란과 위기다. 제조업 중심의 국내 기업들은 국제 에너지,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인한 수입 부담이 확대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미 고공행진을 지속하고 있는 유가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갈등이 고조할수록 상승 전망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8년 만에 최고치인 배럴 당 90달러를 넘어선 두바이유는 22일 기준 배럴당 96달러까지 치솟았고 이번 주 들어 125달러에서 15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와 함께 국내로 수입하는 액화천연가스 가격은 역대 최고치인 톤(t)당 1100달러를 넘어서기도 했다.
세계 천연가스 공급 1위인 러시아가 유럽의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할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천연가스 수급난이 가시화할 수 있고,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 수입이 적고 동맹국인 우리가 쳔연가스를 양보해야할 수도 있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주요 산업의 소재가 되는 광물 가격도 영향을 받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의 주요 원료인 수산화리튬의 가격은 안그래도 상승세가 지속하던차에 지정학적 리스크가 부각하며 22일 기준 런던금속거래소 기준 t당 5만5800달러(6655만원)로 올 초 대비 62%가 올랐다.
석유화학 원자재 가격 상승은 당장은 아니나 소비자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석유화학 원자재 수입가격이 10% 오르면 국산품 가격은 0.25%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정부가 함께 에너지와 원자재 등의 수입선 다변화 등의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꽃별 한국무역협회 동향분석실 연구원은 “원자재 가격 상승세 등이 앞으로 쉽게 안정화하기는 어려워 보인다”며 “지금은 기업들이 장기 계약 등을 통해 당장 어려움을 겪지 않겠으나 사태가 길어질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 수입선 다변화 등의 준비를 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