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반도체 이을 국가대표…누가 '바이오'를 가뒀나

최은영 기자I 2019.07.16 05:00:00

임규태 조지아공대 기업혁신센터 수석고문

스트리밍 전성시대다. 넷플릭스로 대변되는 비디오 스트리밍 시장에 아마존, 디즈니, 애플 등 거물 기업들이 뛰어드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은 사라진 비운의 기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 기업의 이름은 바로 ‘엔론’이다. 1985년 텍사스의 천연가스 기업으로 출범한 엔론은 1990년 하버드 경영학 석사(MBA) 출신의 야심만만한 제프 스컬링이 CE
O로 취임하면서 급격한 변화를 맞는다. 그의 과감한 경영 전략으로 엔론은 전통적인 에너지 기업에서 금융, 정보, 통신을 아우르는 미래 주도 기업으로 화려한 변신에 성공한다. 엔론은 미국의 가장 혁신적인 기업과 대학 졸업생들이 취업하고 싶은 기업 타이틀을 놓치지 않았다.

2000년 엔론은 미국 최대 비디오 대여 체인 블록버스터와 손잡고 광통신망을 이용한 비디오 온 디맨드(Video on Demand·주문형 비디오)를 발표한다. 이날 엔론이 발표한 VOD 서비스가 훗날 넷플릭스의 모델이 된다. 엔론이 보여주는 야심찬 미래에 월가는 열광했고, 주가는 2배로 뛰었다. 하지만, 시간은 더 이상 엔론의 편이 아니었다. 때마침 인터넷 버블이 붕괴하면서 엔론의 VOD 서비스는 엄청난 손실을 기록하고, 철옹성처럼 보이던 엔론은 사상누각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로부터 1년 후 엔론은 공중분해 되었고,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회계 기업 아서 앤더슨도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엔론이 한국에서 부활한 계기는 삼성바이오로직스(이하 삼바) 회계 문제 때문이다. 2015년 삼바가 종속회사였던 삼성 바이오에피스를 관계사로 변경하여 회계 처리한 부분을 금융감독원이 문제 삼은 것이다. 삼바 문제는 삼성 지배구조 개편과 맞물리면서 정치 이슈화 하였고,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 과정에서 삼바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해 분식회계의 대명사인 엔론을 무덤에서 부활시켰다. 하지만, 엔론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면 이런 비유가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엔론이 삼바와 연관되는 부분은 ‘기업 가치 평가’다. 엔론은 공정 가치(Fair Value Convention)라는 새로운 기업 평가 방법을 비 금융 기업 회계에 적용한 최초의 기업이다. 공정 가치는 현재 시장 가격으로 기업 가치를 평가하는 회계 방식으로 시장 가격 (Mark-to-Market)이라고도 불린다. 엔론의 창업자 케네스 레이는 부시 대통령 가문과의 친분을 이용해 금융 기관 평가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되던 공정 가치 평가를 일반 기업에 적용할 수 있도록 규정을 바꾸었다. 엔론은 파트너들과 장기 계약을 맺은 뒤, 미래에 발생할 수익을 현재 기업 가치 평가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기업 가치를 부풀렸다. 엔론이 블럭버스터와 맺었던 VOD 프로젝트도 기업 가치 부풀리기의 일환이었다.

공정 가치 평가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모호함이 발생한다.(이 모호함은 삼바 회계 문제의 원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공정 가치 평가는 명백한 합법이다. 엔론은 공중분해 되었지만, 엔론이 길을 닦은 공정 가치 평가는 이후 더욱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엔론이 없었다면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우버, 에어비앤비, 위워크 등 혁신적 기업들이 천문학적 규모의 묻지마 투자를 받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공정 가치의 모호함은 시장이 해결한다. 대학 기숙사에서 출발한 구글과 페이스북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이면에는 자본주의적 욕망에 충실한 투자자들이 있었다. 미다스의 손을 가진 투자자들의 안목이 뛰어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투자금 회수라는 지극히 이기적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세상물정 모르던 창업자들을 미친 듯이 몰아붙였을 뿐이다. 기업과 주주 사이의 달콤 살벌한 관계에 정부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엔론의 분식회계를 이해하고 싶다면 ‘회계의 언어는 숫자’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회계는 장부에 적힌 숫자의 흐름만으로 누구나 기업을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1494년 복식부기를 처음 선보인 이탈리아의 파치올리가 작성한 장부를 이해하기 위해 그를 무덤에서 소환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이유로 회계에서 가장 중대한 범죄는 ‘숫자’를 고치는 행위다. 엔론의 욕망에 일그러진 경영진은 스타워즈 캐릭터의 이름을 딴 수십 개의 역외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 수익을 부풀리고, 손실을 감추는 방식으로 회계 장부상의 ‘숫자’를 조작했다.

엔론의 분식회계 수법은 대우 그룹의 비극적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회계 전문가 김우중 회장이 일으킨 대우 그룹은 소련 붕괴 여파로 무너진 동구권 국가들에 공격적으로 지사를 설립하면서 빠른 속도로 대우 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글로벌 지사들 간의 금융 흐름이 막히면서 공중분해 될 수밖에 없었다. 대우가 사라진지 18개월 후 엔론도 같은 운명을 맞는다.

(자료=이데일리DB)
인터넷 버블이 터지지 않았다면 엔론은 여전히 살아있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IMF 사태가 없었다면, 대우는 지금도 건재했을지 모른다. 엔론과 대우의 비극적 운명은 기업 활동을 분식회계라는 단순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전하고 있다.

혹자는 삼성의 ‘나쁜 의도’가 문제라고 말한다. 회계는 ‘나쁜 의도’, 즉 자본주의에서 이윤 추구라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을 부정하지 않는다. 기업은 회계 기준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에 유리한 방식을 선택할 권리를 보장받는다. 이러한 회계의 본질적 관점에서 삼바 문제는 결국 ‘회계 기준을 지켰는가, 아닌가’의 문제다.

삼성에 면죄부를 주라는 말이 아니다. 삼바가 회계 규정을 어겼다면, 이에 합당한 처벌을 내리면 된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시간이다. 회계 문제에 발이 묶여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 밖 세상은 국내에서 보는 것보다 휠씬 다이내믹하다. 잠시만 한 눈을 팔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살벌한 세상이다. 대한민국 기업들도 그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세계 1위 삼성 반도체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 여파로 중국 반도체 굴기가 주춤한 사이 한숨 돌리는가 했지만, 곧바로 이어진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제한은 치명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일 반도체 갈등의 결과와 상관없이 이미 일본발 소재 리스크가 현실화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 구조조정은 필연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반도체 구조조정은 극초미세공정을 사용해야하는 D램 메모리 비중 축소를 의미한다.

현재 글로벌 반도체 빅4중 인텔을 제외한 3개 회사가 D램 메모리를 생산하고 있다. 그만큼 D램이 반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삼성이 비메모리를 키우겠다고 선언한 것은 적절했다. 하지만 아무리 비메모리를 키워도 D램 메모리 축소 분을 만회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삼성의 의도대로 반도체 매출이 현재 수준을 유지한다고 해도 국가 경제를 주도할 수 있는 고성장 모멘텀은 사라진다. 지난 30년간 대한민국 경제를 견인해 온 반도체 산업이 그 역할을 후배에 넘길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 후배는 누구일까?

반도체에 이어 대한민국 경제를 이끌 기대주가 바이오 산업이었다. 하지만, 20년을 키워 온 대한민국 바이오 산업의 현재 상황은 처참하다. 삼바는 회계 문제에 발목 잡혀 몇 년째 장기 투자는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셀트리온 역시 작년 말 터진 회계 문제로 감리가 진행 중이다. 바이오 양두마차인 삼바와 셀트리온의 위기는 바이오 산업 전체에 악영향을 미쳤다. 올해 들어 코오롱의 인보사 사태, 에이치엘비의 임상실험 실패, 한미약품의 신약 포기 등의 악재가 잇달아 터지면서 바이오 산업은 존폐 위기에 몰려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기업들에 면죄부를 주라는 말이 아니다. 국가가 기업에 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기업이 안고 있는 불확실성을 투명하고 신속하게 제거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반도체·바이오 산업과 관련한 정부의 대응을 지켜보면 정부가 기업을 살리겠다는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 경쟁력은 강한 기업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는가에 달려 있다. 최근 벌어진 미·중 무역전쟁은 국가의 힘이 기업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미국은 엔론 사태를 발판으로 혁신 기업들을 키워냈고, 이들 기업은 미국의 국익과 안보를 지키는 첨단 무기로 활용되고 있다.

기업은 국가의 미래다. 국가는 미래 먹거리 산업을 선도할 기업을 키워 후대에 유산으로 물려줄 의무가 있다. 하지만, 정치적 이슈에 매몰되어 무너지는 바이오 산업의 처참한 상황은 대한민국의 암울한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솔직히 내 눈에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당신 눈에는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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