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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경기 고양시 장항동 인쇄단지에서 만난 임방호(70) 희망노트사 대표는 1970년대 을지로 제지업계에 입문해 이곳의 희노애락을 직접 경험한 산증인 중 하나다.
1977년 서울 서대문구의 작은 인쇄공장으로 시작한 희망노트사는 2010년 전후부터 자체 브랜드 ‘1977ATTO’ 를 내놓으며 한·일 다이소 진출, 디즈니사와 라이센스 계약, 대형마트 납품 등을 통해 지난해 매출 110억원을 기록한 국내 대표 노트제조 업체로 성장했다.
특히 200여곳에 제품을 납품하는 한국다이소와 달리 일본다이소에는 4000여개의 매장에 제품을 납품한다. 희망노트사가 만든 노트제품은 일본 다이소 문구류 중 판매순위 5위안에 드는 인기상품이기도 하다.
◇을지로 제지업체 대리점서 일하며 인쇄업 배워
전북 부안 출신인 임 대표는 스물다섯 나이에 상경해 을지로에 위치한 한솔제지(213500) 대리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임 대표는 “이곳에서 경리부터 수금, 총무까지 안 해본 게 없었다”며 “4~5년 정도 일하니 종이를 가공해 노트를 만드는 업자가 눈에 띄었다”고 돌이켰다.
업자를 통해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임 대표는 남가좌동에 노트공장을 창업한다. 그는 “수동 중고 재단기를 15만원에 샀었다”며 “하루 200~300권을 수작업으로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1970년대 중후반 재단 기계가 점차 자동화됐다. 노트공장도 급속도로 늘었다. 다이어리로 유명한 ‘양지사’도 이 시기 탄생했다.
1980년대의 특징은 캐릭터다. 임 대표는 “1980년대 학생이 줄면서 노트시장 경쟁이 심화됐다”며 “노트 제조사들이 경쟁처럼 캐릭터를 넣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각종 광고 영향으로 ‘모닝글로리’, ‘바른손’이 성장세를 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1980년대 말 90년대 초가 되자 노트제조사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쓰러졌다. 어음부도가 횡행했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은 알지 못하지만 당시 나름 규모가 있던 ‘대한노트’, ‘신한노트’ 등을 비롯한 노트제조사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장항동 인쇄단지 1세대…“거창한 포부보단 하던 대로 열심히”
지금도 ‘인쇄’하면 충무로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요즘은 장항동이 대세다. 임 대표는 “그간 운영해오던 남가좌동 공장 근처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며 “소음민원으로 인해 2000년 일산 장항동으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장항동 인쇄단지는 임 대표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정책적으로 추진된 단지가 아니다. 희망노트사를 비롯해 몇몇 업체가 서울 근교 부지를 찾아 둥지를 텄고 입소문을 타 이곳엔 현재 수백개의 인쇄관련 업체들이 모이게 됐다.
희망노트사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던 계기는 우선 다이소 납품이다. 희망노트사는 2010년부터 한국과 일본 양국에 스케치북, 종합장 등을 납품했고 이어 디즈니와 계약을 성공한다. 임 대표는 “디즈니 한국지사는 딱 3군데 업체와만 계약을 한다”며 “한 업체가 어려워진 틈을 타 디즈니와 수십번 협의 끝에 라이센스에 성공했다”고 전했다.
더불어 그는 희망노트사만의 자체 캐릭터 브랜드인 1977ATTO도 개발했다. 임 대표는 “이전에 저희가 지닌 투박한 캐릭터로는 대형마트 납품을 하지 못했다”며 “세련된 디자인 개발을 통해 이곳도 뚫었다”고 설명했다.
희망노트사의 매출액은 2013년 50억원에서 지난해 110억원으로 두 배가량 뛰었다. 희망노트사는 노트뿐만 아니라 볼펜, 파우치, 슬리퍼 등 문구류 전반도 외주를 통해 제작하고 있다. 임 대표는 “거창한 포부랄 것까지는 없다”며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열심히 하며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제품을 만들겠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