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제공] 1997년 1월 서울 풍납동 현대리버빌 아파트 신축공사현장에서 백제초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당시 발굴을 담당한 선문대 이형구 교수를 비롯해, 고고학계는 잊혀져 있던 한성백제 500년사를 연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며 흥분했다. 또한 이 지역이 백제의 첫 왕성인 '하남 위례성'이란 추측도 이어졌다.
1997년 4월 풍납토성 내부지역 건설공사시 '사전 발굴'을 해야 한다는 지침이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내려졌고, 급기야 2001년에는 건축행위 제한을 담은 '형상변경지침'도 제정되었다.
이 때문에 현재 풍납동은 제2종 일반주거지역이면서도 지하 2m 이하, 지상 15m 이상의 건축물을 지을 수가 없으며, 공동주택(아파트)의 경우 재건축 및 리모델링이 불가능한 상태다. 또 풍납토성(사적 11호)과 인접한 곳에는 더욱 엄격한 규제가 적용된다.
지난 12일 송파구 풍납동 곳곳에는 보상대책을 촉구하는 현수막들이 걸려있었다. 각종 규제들로 재산권 행사에 어려움을 겪는 주민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풍납동 197번지 옛 미래마을 부지에서는 오늘도 유적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요란한 포크레인 소리, 발굴단의 분주한 손놀림을 지켜보고 있던 풍납동문화재 대책위원장이자, 32년 풍납동 토박이 이기영(60)씨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풍납토성 문제의 시초는 사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죠. 1963년 풍납토성을 사적지로 지정했던 정부가 정책을 바꿔 1969년 6월 이를 해제하고, 70년 봄부터 풍납토성 주변 일부지역을 주민들에게 불하했어요. 당연히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여러 집들이 들어서게 되었죠. 그런데 돌연 1970년 가을 토성주변을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했어요. 이곳에 살던 사람은 졸지에 이도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죠."
이어 김씨는 1997년 이후 풍납동 곳곳에서 유물이 발굴되면서, 풍납토성 인접지역뿐만 아니라 토성 안에 있는 풍납동 대부분 지역(풍납토성은 풍납1, 2동을 타원 형태로 둘러싸고 있다)이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주택 신·개축에서 불편을 느낀 주민들이 이주를 추진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97년 이후로 풍납동에서 집을 맘대로 짓거나 고치지 못하죠. 건축규제가 있거든요. 그래서 사적지에서 오는 불편함을 느끼는 주민들이 자신이 살던 곳을 '사적지'로 신청하고 이사 가려고 해요. 그런데 받을 수 있는 보상금액은 턱없이 부족하고 이 또한 보통 3~4년을 기다려야 받을 수 있죠. 정말 이사 가고 싶어도 맘대로 안돼요."
현재 문화재청은 개별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적지' 신청을 받아 이에 대한 보상을 해주고 있다. 그러나 예산문제로 인해 1년에 70~80가구 정도만 보상받을 수 있으며, 보상금액도 문화재보호구역 지정 이후 떨어진 시가로 지불되다보니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주민들의 불만이 이어지고 있다.
이기영씨는 옛 미래마을 유적발굴 현장 옆에 자리한 풍납동문화재대책위원회 사무실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에는 동네주민 노금희씨(50), 김잠이씨(52), 최동열씨(58)가 풍납토성 문제를 주제 삼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노금희 "97년에 우리 동네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사 오려고 하지 않아. 풍납동에 살면 불편한 점이 많다는 걸 다들 아나 봐."
이기영 "그래 맞아. 나도 예전에 사업(광고업)이 잘 안 돼서 집을 팔아 사업자금을 마련하려고 내놓았는데, 1년 동안 딱 1명만 집을 보더라고. 그 사람도 결국 집만 보고 그냥 발길을 돌렸지. 결국 시기를 놓치고 부족했던 사업자금도 못 만들었어. 정말 그땐 여러움이 많았지…."(한숨)
김잠이 "우리 선조들이 남긴 문화재는 정말로 소중히 가꿔야지. 근데 이것 땜에 속상해 죽겠어. 97년 전에는 옆에 성내동이나 천호동보다 우리 동네 집값이 그래도 높았거든. 그런데 요즘은 거래가 거의 없다보니 우리 동네 집값이 성내동, 천호동 집값보다 훨씬 싸졌다고 그러네.(쓴웃음)"
최동열 "가끔 사람들이 불만 많은 우릴 보고 '지역이기주의'라고 매도하는 경우도 있는데, 솔직히 지난 10년 동안 우리 동네 사람들의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우리 집 아래가 왕궁 터라고 하니… 새집도 맘대로 못 짓는 우리 처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해줬음 좋으련만…."
노금희 "또 우리 동네에 길이 하도 좁아서 소방차들도 제대로 못 드나들잖아. 그래서 구청에다 도로 넓혀달라고 민원 집어 넣으면, 문화재보호 뭐… 규제를 들어서 길도 맘대로 못 넓히잖아. 그리고 사적지로 보상된 곳은 공터(주차장)로 남겨져. 동네가 점점 슬럼화 돼가니 마음이 답답하네."
노씨의 말처럼 풍납동에는 경차 한 대가 지나가기 버거울 정도의 좁은 골목길들이 많았다. 또 다른 곳과는 달리 동네 주변에 주차장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개인이 사적지 신청을 한 땅을 정부에서 매입해 아스팔트를 깔아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던 것이었다.
풍납동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그동안 사적지로 매입된 곳에 아직까지 발굴조사는 없었으며, 거주자 우선 주차장을 만들어 주민들을 상대로 수입을 챙기는 모습만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답답함을 느꼈던 주민들은 지난 2006년 9월 주민총회를 열어 풍납동 문화재 대책위원회를 발족했으며, 각종 궐기대회, 주민설명회 등을 벌이고 있다. 또 올해 3월에는 송파구 지역구 의원인 한나라당 맹형규 의원을 주축으로 해서, 특별법 제정을 위한 제정협의체 구성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가하고 '풍납토성 문제'는 아직 큰 진전을 보이고 있지 않다.
재산권 행사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는 시점에서, 풍납토성 발굴사업의 주무부처인 문화재청의 입장과 대책이 궁금했다.
문화재청 사적과 김석희씨는 전화통화에서 "현재 주민들과 제정협의체를 구성해 다양한 논의를 벌여나가고 있으며, '지하 2m 이하 지상 15m 이상 건축금지 규제'는 풍납동 주민 그리고 송파구청과의 지속적인 협의를 통해 차후 현실적인 방향으로 검토해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주를 원하는 주민들이 신청하는 '사적지 보상'에 대한 예산은 한정되어 있어, 정부 차원의 예산증액이 있기 전까지는 지금의 수준을 넘기 힘들다"며 주민들에게 이해를 구했다.
1970년 일본 사가현 간자키시 지역에서 대규모 공장 및 택지개발 사업을 벌이다가 동검주형, 탄화미, 목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기원전 3세기부터 약 500년간 지속된 야요이 시대의 '요시노가리' 유적을 발견한 것이었다.
일본 문화재 당국은 개발보다는 요시노가리 유적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역주민들에게 현실적인 보상대책을 마련해주었다. 그 결과 지역주민들과 불협화음 없이 요시노가리를 세계적인 고대유적으로 가꿀 수 있었다. 또 요시노가리는 지역주민들의 자부심이 되었다.
문화재 보존을 위해서는 지역주민의 자부심이 필요하다. 역사의 한 순간을 발견하는 기쁨에 지역주민들도 동참해야 한다. 각종 건축규제만이 난무하는 풍납동에는 이런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이 피부로 느끼는 혜택이 없어서 그랬을까. 주민들은 무표정했다.
문화재 보존의 소중함을 알게 된 짧은 역사 그리고 숙련되지 못한 문화재 행정은 우리의 차가운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