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피해를 호소한 여성 비서의 외침은 4년 씩이나 묻혀 있었습니다. 영문은 알 수 없지만 박 전 시장은 이 피해자의 경찰 고소사실을 적어도 당일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청와대도, 경찰도 이를 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같은 진실 공방 속에 피해 여성에 대한 2차, 3차 가해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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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은 건물 내에서 생활하던 박 전 시장의 극단적 선택 만큼이나 지금 이 상황은 비현실적이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인권 변호사`이자 과거 무자비했던 성고문 사건의 변호까지 맡았던 박원순, 그리고 그가 10년 가까이 이끌어 오면서 그 어떤 조직보다 양성평등이 잘 실천되는 듯 보였던 서울시.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시정 전반의 여성 참여를 통해 성(性) 주류화를 실현하겠습니다.”
작년 11월 한 언론사가 주최한 여성리더십 포럼에 참석한 박 전 시장은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과 고용률이 남성에 비해 20%포인트 낮은 대한민국의 현실을 지적하며 이같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성주류화는 성평등 이슈를 정책의 모든 단계에 적용해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혜택을 누리고 불평등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주류화 앞장 선 박원순…세계가 인정한 여성정책
박 시장은 지난 2011년 서울시장이 된 뒤 일관되게 성주류화를 시정에 반영하고 이를 실현하는데 힘써온 인물입니다. 민선5기(2011~2014년) 시절인 지난 2012년 서울시 내에 성평등위원회를 발족하고 모든 정책을 성평등의 관점에서 추진해 성 불평등 해소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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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끝이 아니었죠. 그 다음 민선 6기(2014~2018년)에서는 국내 지방자치단체 중에서는 최초로 젠더(gender) 자문관을, 민선 7기(2018~)에선 젠더특보를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젠더 자문관은 5급 사무관 팀장으로 서울시장단 회의에 참석해 각종 정책에 자문하고, 주요 정책에서 협조 결재를 해왔습니다. 젠더특보는 박 시장에게 여성정책을 조언자로 임명돼 자문을 맡아왔습니다.
단순히 보여주기식 정책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직위 신설에 걸맞게 민선 5기에서 불과 78개에 그쳤던 서울시의 성별 영향평가 사업수는 민선 7기인 현재 130개까지 늘어났습니다. 5급 이상 여성관리자 비율은 같은 기간 19.4%에서 24.7% 높아졌습니다. 위원회의 위촉직 여성위원비율 역시 36.9%에서 41.1%까지 올라갔습니다.
서울시의 이같은 노력은 외부에서도 인정을 받아 공공행정분야에서 최고로 꼽히는 유엔공공행정상을 무려 다섯 차례나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는데요, 수상 내용 모두 여성 관련 정책들로 인해 받은 상이었습니다.
여성친화 시스템 모범 서울시…“이중잣대가 문제”
그런데 이처럼 직원내부 교육은 물론 정책 결정 전반에서 모범적인 시스템을 갖춘 것으로 평가를 받았던 서울시에서, 그것도 하필이면 일찍부터 여성 권익보호에 앞장섰던 박원순 전 시장이 성추행 혐의로 피소되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졌을까요. 여성정책의 조언자 역할을 하는 젠더특보는 왜 박 전 시장에게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을 내부에 전파하는 데 소극적이었던 걸까요. 박 전 시장을 고소한 전 직원이 4년동안 지속적으로 성추행 피해를 당했는데도 왜 이렇게 훌륭한 내부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을까요.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에 대한 해답의 단초를 찾기 위해 서울시공무원노동조합 고위 간부와 얘기를 나눠 봤습니다. 이 분은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견제에서 취약해지는 구조적인 문제가 원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성평등 교육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동등하게 이뤄지고 있지만, 막상 성희롱이나 성추행, 성폭력 등 사건이 발생하면 하급 직원일수록 배운대로 대처하기 쉽지 않다는 겁니다.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가 4급 이하 직원일 경우 현장에서 바로 문제제기를 하거나 여성인권담당관 등에 알리는 데 그나마 심리적 부담을 덜 느끼는 데 반해 관리자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통상 관리직 이하 직원들이 성희롱·성폭력·성매매·가정폭력 등 이른바 4대 폭력을 저지르게 되면 철저한 조사와 직위해제 등 중징계가 내려집니다. 하지만 관리자의 경우 인사발령이나 승진 누락 정도에 그쳐 피해를 입더라도 내부 고발을 하기 쉽지 않다는 겁니다.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하위직 공무원들에게는 가혹하게, 고위직들에게는 관대한 이중적 잣대가 견제의 목소리를 내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이 고위 간부는 성추행 의혹이 제기된 박 전 시장 역시 구조적 문제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는 “시장 보좌진들이 제 역할을 했다면 내부적으로 인지하고 초기에 강력하게 대응했어야 했다”면서 “문제가 터지기 전까지 몰랐다는 것은 보좌진이 제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그러면서 서울시가 구성하는 민관합동조사단에 “의혹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고인의 개인적인 일탈로 치부하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면서 “사실관계 확인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구조적 문제를 파악하고 재발방지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속도감 있는 정책, 그러나 변화는 사람이 만들어야
성평등 제도와 사내문화의 비대칭성을 없애는 것 역시 서울시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서울시가 젠더 감수성을 높이기 위해 관련 정책을 발빠르게 도입하고 직원 교육을 강화하는 것을 놓고선 직급을 막론하고 모두가 이견 없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다만 박 전 시장 취임 이후 지난 10년간 이런 정책들이 속도감 있게 추진되다 보니 세대별로 젠더 감수성을 체화(體化)하는 속도가 다른 데서 오는 괴리도 함께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중장년층 직원들의 경우 젊은 세대에 비해 젠더 감수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교육을 더 강화해야는 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즉, 정책 도입에 따른 의식의 변화속도가 제각각인 과도기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실성 있는 대안을 마련해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아울러 젠더특보와 같은 직제가 가진 상징성에 비해 이 자리에 기용된 인물로 인한 한계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성추행 의혹에도 피해자보다 시장님을 먼저 챙겼던 임순영 젠더특보인데요. 임 특보는 지난 1990년대부터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에서 근무하다가 박 전 시장이 만든 희망제작소를 통해 고인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런 태생적 한계가 `윗분`에 대한 견제와 비판을 어렵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서울시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는 “젠더 감수성이 낮은 발언이나 행동에 대해 자유롭게 문제 제기할 수 있는 조직문화를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아직 서울시의 조직문화 자체가 선진화한 제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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