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박정수 기자] 국민연금이 본격적으로 시행한 스튜어드십 코드가 첫발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경영참여형 주주권 행사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위해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가 올해 첫 회의를 열었으나 전문위원 간 구체적 합의는커녕 의견차이만 재확인했다. 특히나 위원들 간에 자신들을 추천했던 기관의 주장만 피력하느라 상반된 의견을 내놓으면서 파열음만 커지고 있다. 이렇다 보니 이번에도 국민연금 위원들의 전문성과 독립성 논란은 불거져 나온다.
◇쟁점도 다루지 않은 수탁자전문委
24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대한항공과 한진칼에 대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여부와 범위를 논의할 기금운용위원회는 다음달 1일께 열릴 것으로 전해진다. 한 기금위원은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의 녹취록을 받아봐야 알겠지만 전제되는 쟁점들이 전혀 다뤄지지 않았다”며 “가장 큰 쟁점이 단기매매차익 반환에 대한 점검 요인들인데 이를 따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재 국민연금은 대한항공과 한진칼의 지분을 각각 11.70%, 7.34%를 가지고 있어 ‘10%룰’과 ‘5%룰’에 해당된다. 5%룰은 특정 기업 지분을 5% 이상 가진 투자자가 지분이 1% 이상 변동될 경우 5일 이내에 신고하도록 한 규제다. 10%룰은 특정 기업 지분을 10% 이상 가진 투자자가 지분이 1주 이상 변동되면 신고하는 제도다.
특히 10% 이상 지분을 가진 투자자가 단순 투자 목적을 경영참여로 바꿀 때 매매 후 6개월 이내 매매차익에 대해서는 법으로 정한 산식에 맞춰 해당 기업에 반환해야 한다. 여기서 기금위가 열리기 전 수탁자책임 전문위는 대한항공·한진칼에 대한 주주권을 행사했을 때와 안 했을 때의 유권해석 등의 요인을 따져 기금위에 보고해야 한다.
한 기금위원은 “일시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할 때 보유목적 변경이 가능한지 선례가 없으므로 이를 연구·검토했어야 한다”며 “유권해석 기관인 금융위원회에 사전 점검도 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단기매매차익 반환 시점이 주주총회 개최로부터 6개월 전인지 경영참여 제안일로부터 6개월 전인지도 따졌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위원들이 단순히 찬반 의견만 내놓은 탓에 현재 기금위원들이 다시 질의서를 기금위원장한테 넘긴 상태다. 전삼현 숭실대학교 법학교수도 “이번 회의에서 이사 선임에 대해서 반대의견을 내기는 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기금위의 결정”이라며 “수탁자책임 전문위는 최종 승인을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결국 전문위원들은 찬반 의견만 내놓고 자신들을 추천했던 기관의 주장만 피력했다는 지적에 벗어날 수 없다. 국민연금의 독립성 문제는 문재인 대통령 공약사항이었고 16대 국회에서부터 논의됐던 사항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해관계자들이 얽힌 탓에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 교수는 “주주권 행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논의와 발언들이 있었는지를 투명하게 공개할 필요가 있다”며 “독립성 침해에 대한 우려를 일정 수준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1일에 열릴 기금위에서 ‘대한항공·한진칼에 대한 주주권 행사 여부 및 행사 시 그 범위’ 등에 대한 캐스팅 보트(합의체의 의결에서 가부가 동수인 경우에 의장이 가지는 결정권)도 지역가입자 대표위원 6명에게 달려 있어 전문성 논란은 더욱 가열될 전망이다.
현재 법상(국민연금법 제103조)으로 기금위(20명) 출석 위원 과반수의 찬성해야 안건은 의결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에 대해 언급한 만큼 정부위원(복지부 장관, 주요부처 차관 4명, 국민연금 이사장)은 주주권 행사 찬성이 예상된다. 여기서 노동조합 대표위원 3명을 더한다고 해도 반수는 안 된다.
재계를 대표할 사용자 위원 3명의 반대표가 예상된다고 하면 결국 지역가입자를 대표하는 6명과 관계 전문가로서 국민연금에 관한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자 2명이 캐스팅 보트를 쥐는 상황이다. 여기서 과연 농어업인 단체 및 자영자 관련 단체에서 추천 인물이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지는 논란이 될 수 있다.
한 대학 교수는 “국민연금 독립성이 확보될 때까지 위탁사들에게 의견을 맡기거나 상시 감독을 하는 민간 위원회를 통해 의사 결정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평했다. 김정식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는 “정치적 요인이 들어갔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면서도 “국민연금은 원칙을 세운 대로 따라야 한다는 전문가 의견이 많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의 최우선 과제는 수익률 제고…“과도한 경영권 참여는 헌법 위반”
한편에서는 국민연금이 단기 매매차익을 토해내면서까지 경영참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존재한다. 금융정보제공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지난 8일 기준으로 국민연금이 대한항공의 매매차익을 반환한다면 총 959억원을 토해내야 한다. 매매차익 반환과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에 따른 주가 상승 중 수익률 면에서 어떤 선택이 유리할지 결정해야 한다.
이원일 제브라투자자문 대표는 “한진가가 사회적으로 이슈를 일으킨 탓에 이사회에서 재임용을 막아야 한다는 여론이 있지만 국민연금이 가장 신경을 써야할 부분은 기업의 주가”라며 “궁극적으로 스튜어드십 코드 이행을 통해 한진그룹과 그 계열사 간의 경영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에서는 국민연금이 독립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에 나설 경우 기업 경영권 침해에 대한 우려 존재한다고도 지적한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헌법 126조에 따르면 국방상 또는 국민경제상 긴절한 필요로 인해 법률이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하거나 그 경영을 통제 또는 관리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며 “국민연금이 헌법 위반의 소지도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한진가의 사회적이슈를 가지고 국민연금을 통해 관리하려 한다는 우려를 사기 충분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