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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명맥 이어온 헌책방골목
한국전쟁 때 부산은 피란지였다.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좁은 땅에서 부대끼며 살았다. 사람이 모이다 보니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됐다. 처음 시작은 일본인이 떠난 자리에 사람들이 모이면서부터다. 이후 전쟁통에 피란민이 장사를 했고 미군의 군용물자, 부산항으로 들어온 물건이 주로 거래됐다. 당시 부산의 국제시장 한편에서는 피란길에 짊어지고 온 책을 사과궤짝에 올려놓고 파는 거리가 생겨났다. 아이들의 교과서도 있었고 미군부대서 흘러나온 영어책도 있었다. 사과궤짝 위에서 시작한 중고책 시장은 담벼락에 책장을 놓고 팔던 시절을 거쳐 지금의 작은 서점들이 모인 헌책방 거리로 발전했다.
삶이 어려웠던 피란시절. 먹고사는 일이 버거우니 아이들 가르칠 학교가 제대로 있었을까. 구덕산 자락의 보수동 뒷산에는 수많은 피란민 아이들을 가르칠 노천교실과 천막교실 등이 자연스럽게 열렸다. 당시 학생들의 통학로였던 보수동 골목길에 책방이 하나둘 모여들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신학기가 되면 가난한 학생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때때로 희귀본이나 값진 개인소장 고서도 흘러들어와 지식인 수집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전성기는 1960~1970년대. 당시에는 70여개의 책방이 있었다. 지금도 약 200m의 좁은 골목구석에는 50여개의 책방이 오밀조밀 붙어 영업을 하고 있다. 그 가운데 고서점·대우서점 등이 5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터줏대감이다.
가게마다 보유하고 있는 책의 종류가 달라 원하는 책을 구하려면 발품 깨나 팔아야 한다. 헌책은 새책 보다 70~40% 저렴하다. 물론 책방주인과 협상도 가능하다. 초·중·고 교과서나 참고서, 아동도서와 소설류, 사전류·고서적·만화·잡지·외국도서·실용도서 등 세상의 모든 책이 이곳으로 흘러와 새 주인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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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스르는 골목 속으로
골목으로 들어서기 전에 들러 볼 곳이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이다. 문화관은 책방골목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다양한 자료를 전시해둔 곳. 부평 깡통시장 입구 맞은편에 있다. 총 8층 건물로 1층은 안내실, 2~3층은 박물관이다. 4층은 다목적홀, 5층은 사무실, 6~7층은 책과 함께 차 한 잔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북카페가 들어서 있다. 8층 옥상 정원에는 쉼터가 있어 책방골목을 찾는 관광객에게 잠깐의 여유를 제공한다.
일단 보수동 책방골목에 들어서면 어디를 먼저 가든 상관없다. 하지만 골목이 동서로 길게 늘어서 있어 여행자에게는 중앙동 방향의 골목 끝에 자리한 단골서점부터 시작하는 게 그나마 편하다. 단골서점은 대로변에서 책방골목의 시작을 책임지고 있는 가게다. “아(아이) 들 꺼 팝니더”라는 주인장의 퉁명스러운 말처럼 만화·소설·무협지·아동도서를 주로 취급한다. 언제 걸렸는지 모를 정도의 낡은 간판이며 진열대 위 낡은 책에게서 왠지 모를 정감이 풍긴다.
단골서점을 지나면 골목길이 본격적으로 좁아진다. 아슬아슬함의 연속이다. 헌책이 워낙 많아 책꽂이에 꽂힌 책보다 쌓아놓은 책이 많기 때문. ‘책탑’을 고수하는 건 세로로 높게 쌓아 올리는 것이 책꽂이에 꽂아두는 것보다 공간을 덜 차지해서라는 게 이곳 주인장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또 다른 이유는 팔리는 책보다 들어오는 책이 더 많아서다. 책방을 넓혀도 이내 책탑이 다시 쌓인단다. 골목길에선 한발한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책탑 사이로 돌아다니는 ‘내공’이 생기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긴장감은 사라진다.
책방골목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은 우리글방이다. 지상 1개층과 지하 1개층을 쓴다. 지상층은 오래된 레코드판과 책방골목 사진가가 찍어준 흑백사진들이 군데군데 붙어 있어 마치 카페에 들어온 듯한 느낌. 서점 중앙의 철제계단을 내려가 지하층에 도달하면 방대한 서적들이 압도하는 책세계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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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동의 터줏대감 ‘고서점’
책향은 좁은 골목길 바닥에서도 묻어난다. 나도향의 ‘벙어리’, 이상의 ‘날개’ 등 국내 유명작가뿐 아니라 서미싯 몸의 ‘달과 6펜스’ 등 외국 유명작가의 작품이 보도블록에 새겨져 있다. 골목 끝에는 고(古)서점이 있다. 원래 이곳 주인은 1세대 보수동 책방골목지기인 양호석 씨. 지금은 막내아들 양수성(41) 씨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여기선 고서와 인문서적을 주로 판다. 좁은 입구 사이로 다른 곳보다 퀴퀴한 냄새가 가득한 것도 그 이유. 따로 마련한 회관은 거의 민속박물관 수준이다. 구석구석 돌·가구·도자기·그림·목기·지도 등 미술품과 민속용품,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고서 등 셀 수 없는 수집품이 좁은 가게 안에 가득하다. 그중 양씨가 보여준 ‘조선어학습장’은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헌책이다. 양씨는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어가 국어였고, 조선어는 외국어였기에 국어학습장이 아닌 조선어학습장이라고 이름이 붙었다”고 설명했다. 책은 또 하나의 역사이자 기록이라는 것이다.
책방골목에서 주의할 점은 단 한 가지. 교환이나 환불이 안 된다는 것. 그래서 시리즈물이나 전집을 구매할 경우 귀찮더라도 한 권 한 권 책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하는 게 좋다. 또 책들이 거의 다른 사람의 손을 거친 것이라 손때나 먼지가 쌓여 있을 수도 있으니 물티슈를 챙기는 것도 좋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힘이 들었다면 잠시 마음에 드는 북카페를 찾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추천한다. 헌책방과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아기자기한 카페·공방·레스토랑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중 골목 안쪽에 자리한 ‘미오 8과 2분의 1’은 책도 보고 헌책도 사갈 수 있는 곳이다. 또 맞은 편 ‘젬마’는 목공방을 겸하는 곳으로 독특한 분위기에 이끌린 구경꾼들로 늘 붐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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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길=부산역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할 경우 보수동 방면으로 59번, 60번, 81번 버스를 타고 부평동이나 보수동 정류소에서 하차하면 된다. 지하철을 이용하려면 자갈치역에서 3번 출구로 나와 극장가 쪽으로 올라가 국제시장을 지난 뒤 대청로 네거리에서 보수동 방면으로 걸어가면 책방골목 입구가 나온다.
△잠잘곳=부산 해운대에는 파크하얏트 부산, 파라다이스 부산, 웨스트 인 조선 등 럭셔리한 분위기의 호텔이 즐비하다. 또 서면에는 롯데호텔 부산이 있다.
△먹을곳=골목 안쪽에 자리한 분식집은 주말에 손님들이 줄을 서 고로케를 사갈 정도로 유명하다. 부평깡통시장은 부산어묵의 성지와도 같은 곳. 책방골목 맞은 편으로 들어가 부산어묵을 맛보는 것도 좋다.
△주변볼거리=좀 더 다양한 구경을 하려면 남포역에서 내려서 남포동 상가를 지나 국제시장을 구경하고 보수동까지 돌아보는 방법이 있다. 넉넉잡아 한 시간이면 돌아볼 수 있으며 용두산 공원에 올라가면 바다와 함께 보수동, 국제시장을 내려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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