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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득 칼럼]부끄러움과 바꾼 회고록

양승득 기자I 2024.07.12 05:00:00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목판본, 1647년)이 수많은 시간이 흐른 오늘날에도 우리나라 회고록의 으뜸으로 꼽히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임진왜란 극복 과정에서 민족 모두가 겪어야 했던 고난과 굴욕, 그리고 참상이 읽는 이들의 가슴에 무언의 교훈을 뼛속 깊이 심어주기도 하지만 진솔한 술회와 과장되지 않은 객관성이 눈길을 끌고 있어서다. 때문에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문학성과 함께 사초(史草)의 가치도 상당하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오늘이 있는 것은 하늘이 도운 덕분이고, 백성이 나라를 사랑한 덕분”이라고 써내려간 서문에서는 구도자와 같은 겸손과 고뇌, 반성의 모습까지 손에 잡히듯 떠오른다. 자서전이나 회고록의 가장 중요한 저술 요점은 자신의 과오를 솔직하게 뉘우치고 기술하는 데 있다고 작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대목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가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으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징비록’ 역시 생생한 필치와 객관성 등에서 그에 못지않은 명저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야당의 집요한 탄핵 공세와 마구잡이 국회 운영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판국에 한가롭게 회고록 이야기를 들고나온 건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진표 전 국회의장 등 국가 지도자의 자리에서 내려온 이들의 회고록을 둘러싼 논란이 연이어 화제가 됐던 일들과 무관치 않다. 열성팬 정도는 돼야 끝까지 참고 읽어줄 자화자찬식 내용이 대부분이겠지만 일부 대목은 정치, 외교적으로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탓에 진위 논쟁과 함께 한동안 뉴스의 초점이 됐기 때문이다. 대통령 전용기를 동원한 김정숙 여사의 인도 방문을 ‘사상 최초의 배우자 단독 외교’라고 우겨댔다가 망신을 산 문 전 대통령의 억지 주장이 대표적인 예다. 김 전 국회의장은 “2022년 12월 초 윤석열 대통령과의 독대에서 나왔다”며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의 조작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내용을 실어 대통령실의 강한 반발을 불렀다. 대통령실이 “독대를 요청해 나눈 이야기를 멋대로 왜곡해서 세상에 알리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라고 화들짝 놀라 비판했으니 사실 여부를 떠나 김 전 의장의 말과 인격도 상처를 입었다. 회고록의 무게와 신뢰에도 흠집이 났을 게 뻔하다.

회고록의 목적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삶의 궤적을 반추하며 많은 이들에게 기록으로 전하고자 하는 데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랑이나 타인에 대한 비방, 원망이 넘실대고 반성과 참회 대신 과장과 변명으로 진실을 가리려 한다면 회고록의 자격이 없다. 위선과 허영으로 포장한 홍보 책자요, 자기만족을 위한 소소한 일기장일 뿐이다. 세상을 어지럽히고 역사를 틀리게 기록한다는 점에서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소중한 돈을 책값으로 지불하고 시간을 쪼개 필자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 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참회록을 써도 시원찮을 이들이 회고록이라는 이름으로 과거 허물과 부끄러운 언행을 덮으려는 사례가 허다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는 이런 데 있다. 통렬한 반성과 겸손, 마음 비우기 없이는 ‘회고록’ 타이틀을 붙이지 말라는 경고나 마찬가지다.

고위직이나 명예로운 자리에 있을수록 말과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물러난 후에도 유효하다. 한마디 말과 선을 넘은 한순간의 행동으로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는 저명인사들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하고 있다. 하물며 자신의 평생과 발자취, 생각과 신변잡기를 세세히 풀어놓는 책자라면 찬사와 존경보다 비판과 공격, 조롱의 대상이 될 위험이 더 크다. 굳이 회고록 이름을 붙이고 싶다면 모든 리스크를 감수하고 거짓 없이 세상을 향해 다가가겠다는 각오부터 단단히 하는 것이 순리다. 중국 천추전국시대의 사상가 노자는 “아는 자는 말이 없고 모르는 자가 말을 한다”고 일렀다. 까마득한 옛적 경구지만 회고록 홍수 시대에 전하는 무게는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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