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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오늘도 폭풍이 몰아친다. 저 비바람을 견뎌내려면 달리 방법이 없다. 웅크리고 수그려야 한다. 초가지붕을 얽은 밧줄이 그렇듯, 잡고 묶어 버텨야 한다. 그 순간 바라는 게 있다면, 여린 지팡이에 의지한 내 몸의 운신보다 부디 저 조랑말이 놀라 도망치지 않기를, 뒤꼍 소나무가 제 가지를 꺾지 않기를, 절망도 사치고 희망도 과분하고 그저 세상이 온전히 살아남아 있기를.
한 점 그림이 쏟아내는 겹겹의 서사. 미처 다 꺼내놓지 못한 이야기들이 저 벽에 걸렸나 보다. 비바람 소리는 온데간데 없고, 대신 처연한 색만 남겼다. 휘몰아치던 그날 제주의 폭풍을 서울의 화랑까지 몰고 온 이는 화가 변시지(1926∼2013).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 연 회고전에 그이가 오랜만에 먼 길을 떠나왔다.
‘변시지, 시대의 빛과 바람’이란 테마로 40여점을 걸었다. 바람과 폭풍, 맞다. 이 모두는 제주로부터 불어왔다. 제주 출신인 작가가 세상을 돌고 돌다가 50세에 다시 제주로 귀향, 87세에 타계하기까지 38년간 붓끝에 담아낸 ‘제주’다. ‘태풍’(1982·1987), ‘폭풍’(1984·1989·1991), ‘폭풍의 바다’(1989·1990·1993) 등 이른바 ‘바람 시리즈’를 앞세워 ‘성산포’(1987), ‘산방산’(1990), ‘고목’(1991), ‘오름’(1992), ‘귀로’(1995), ‘고독’(1995), ‘갈래길’(1998), ‘하늘로 가려는 나무’(2003) 등등, 마치 그이의 일대기를 보여주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손님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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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하나, 초가 한 채, 조랑말 한 필, 소나무 한 그루, 까마귀 한 마리, 돛단배 한 척, 멀리 섬 하나, 그 섬을 비추는 해 하나. 작품에는 뭐 하나 특별하지 않은 소재로 특별한 분위기를 빼는 결정적 무기가 있다. 바로 ‘황토’다.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눈이 아릴 듯한 그 색으로 또 빛으로 사람의 가슴을 짓누르는 돌덩이 하나씩 던지고 있는 거다.
△황톳빛 바탕에 먹선으로 바람·고독 그려
제주 서귀포에서 났다. 여섯 살 남짓 됐을까. 가족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고. 씨름에 재능이 있었나 보다. 소학교 2학년이던 1933년 대회에 나가 상급생과 겨뤘단다. 그런데 그날 심하게 다친 다리가 그의 일생을 바꾸게 될 줄은 몰랐을 거다. 하나는 그이가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림공부에 몰입하게 됐다는 거다. 오사카미술학교에 진학한 그이가 당대 일본 화단의 거장이던 데라우치 만지로 도교대 교수의 문하생이 된 것도 어찌 보면 운명이었다. 그의 일생 화업에 흐르던 후기 인상파 표현주의 기법이 나오게 된 발단이기도 했으니끼. 그저 ‘그림을 그렸다’로 끝나지 않았다. 1948년 일본 최고 권위 미술전 ‘광풍회전’에 나서 최고상까지 받았다니. 23세였다. 한국인으로 처음이었고, 일본인을 끼워서도 가장 젊은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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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잘나가던’ 작가가 불현듯 한국에 돌아온 건 1957년 서울대 교수로 초빙하겠다는 제안 때문이었단다. 하지만 1년만에 그만두고 만다. 한국사회에도 화단이란 조직에도 적응하지 못한 거다. 대신 창덕궁 비원 등을 소재로 한국의 화풍을 찾겠다는 소신을 내보였다. “민족적인 기반 위에 나의 예술을 세워야겠다”고 했더랬다. 그 시간이 얼추 20년, 하지만 ‘우아한 한국의 전통미’는 그의 일색이 되진 못했던 것 같다. 결국 1975년 제주로 낙향을 결심했다. 그의 나이 쉰이었다.
사실 비원을 그리는 붓질로 제주를 표현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제주’ 역시 쉽지 않았다는 얘기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피를 말렸고. “작품이 안 되니 술로 배를 채웠는데, 하루만 마시지 않아도 못 살 것 같은 폭음의 세월이었다”고 회고할 정도였으니. 그러던 어느 날 ‘개안 했다”는 때를 맞고야 만다. “나이 오십에 섬의 척박한 역사와 수난으로 점철된 섬사람들의 삶에 개안 했을 때 나는 제주를 에워싼 바다가 전위적인 황톳빛으로 물들어감을 체험했다”고 했다. “하얗다 못해 누릿한” 황토색 바탕에 먹선으로 대상을 그려 얹는 독특한 조형어법이 기어이 탄생을 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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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제주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니”
그렇게 작가의 화풍은 의도를 했든 아니든 분명한 경계를 가지게 됐다. 일본시절(1931∼1957), 서울시절(1957∼1975), 제주시절(1975∼2013). 이번 전시는 그중 제주시절만 들여다본다. 이 시절을 작가와 함께한 중요한 것들이 있으니, 앞서 얘기했던 사람, 조랑말, 까마귀, 초가, 소나무 등. 그중 ‘사람’에게 작가는 소년부터 중년까지 미묘한 세월의 무게를 감내하는 역할까지 부여하는데, 맞다. 짐작할 수 있듯 ‘지팡이를 짚은 작가’로 보이는 거다. 집 주위를 거닐거나 꺼질 듯 웅크리고 앉았다. 땅바닥에 뭔가를 그리기도 하고 먼 수평선을 하염없이 내다본다. 간혹 해녀가 등장하고, 까마귀가 떼로 날지만, 그저 자리 비운 사람을 대신하는 것처럼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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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 작품세계에 변화가 있다면 1986년 이후 등장한 ‘검은 바다 시리즈’라 할 거다. 비로소 그이의 밤과 낮이 선을 긋게 되는데. 어둠의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칠흑같이 검은 바다, 눈이 부셔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는 노란 하늘. 물론 밤낮의 일갈에도 굴하지 않는 지독하게 누런 황톳빛, 그치지도 않고 불어대는 바람·태풍은 그대로지만. 도대체 바람이 뭐길래. 오래전 작가는 그 힌트를 비추기도 했다. “바람 부는 제주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서”라고. “고독, 인내, 불안, 기다림, 제주의 역사는 바람으로부터 시작됐다”고.
그러곤 고독했던 소년은 외로운 노인이 됐다. 그렇다고 그게 못내 씁쓸한 일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작가는 ‘노인의 경지에 이르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했으니. “동양의 미는 노경에 있고, 노경은 자연에서 완전히 성숙한다”고 말했으니. 그 방법으로 ‘지워나가기’를 택했나 보다. 말년에 이르러 그이는 엉킨 바다와 하늘에 가는 선 하나를 긋고 작은 배 한 척만 띄우고선 그림을 마무리한다. ‘점 하나’(2005)다. 그에 관한 얘기는 타계 한 해 전인 2012년에 한 인터뷰에서 나왔다. “그림을 그린다는 건 외로운 것이다. 근래에는 초가집도 빼고, 까마귀도 빼고, 사람도 빼고, 그저 바다와 하늘만 그릴 때가 있다. 등장하는 소재들이 점점 사라지고, 언젠가는 점 하나로 제주를 표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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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제주로 범벅을 하고도 그이는 제주화가로 남는 일은 극구 부인했단다. 전시장에서 만난 큰아들 변정훈 아트시지재단 이사장은 “아버지는 내 그림이 제주에서 이뤄졌지만 제주를 벗어나는 게 목표라 했다”고 일러줬다. 이번 회고전이 그 단초가 될까. 재단이 소장한 작가의 작품 수는 1300여점. 이들을 지켜낼 수 있게 미술관을 만드는 건 아들의 목표라고 했다. 전시는 11월 1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