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수가 뭐기에…

조선일보 기자I 2010.05.29 15:5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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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동운 기자 dulana@chosun.com

기초단체장 권한 3888개 주차단속부터 대형건설 인·허가까지
1년 예산 2000억~3000억원 건설업체와 유착 비리 많아

영양군·옥천군·해남군·당진군·여주군·연기군·보은군·화순군….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올 들어 군수(郡守)가 비리 혐의로 처벌받았거나 수사가 진행 중인 곳이다. 군수 비리는 자고 일어나면 터져 나온다.

같은 기초단체장이라도 인구가 많은 시장(市長)은 시민과 언론의 감시라도 받지만 시골 군수는 견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군수는 옛날로 치면 '사또'다. 대체 무슨 비리를 저지르고 있고 이는 왜 반복되는 것일까.

최고 청정지역으로 꼽히는 경북 영양군의 권영택 군수가 감사원 감사에 적발돼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권 군수는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모 건설사에 27건의 공사(30억원)를 수의계약으로 발주해줬다.

권 군수는 이 대가로 해당 건설사로부터 2억5000만원을 부인 계좌로 입금받아 부인이 운영하는 스크린골프장 시설비로 사용하게 했고, 스크린골프장 건물 임차보증금 3억원도 건설사가 대신 냈던 것으로 드러났다.

권 군수 부하직원 12명도 식당 업주에게서 백지 영수증을 받아 허위 지출 결의서를 만들어 2000여만원의 야간급식비를 챙겼다. 여기에 군의원까지 국가보조금 4억원을 부당하게 타낸 뒤 구속돼 지역에선 '영양군 비리3종 세트'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달 18일엔 이향래 충북 보은군수가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됐다. 이 군수는 김모씨를 기능직 공무원으로 채용하고 김씨 아버지에게 3700만원을 받았다. 이 군수는 골프장 사업을 하는 정모씨로부터 청탁과 함께 2000만원을 받았다.

김충식 전남 해남군수도 뒷돈을 받았다가 구치소에 들어갔다. 군청이 발주한 '땅끝마을 경관조명공사' 사업권을 주겠다는 명목으로 업체로부터 1억5000만원을 받는 등 3개 업체로부터 1억9000여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체포 과정에서 '추격전'과 '위조여권'으로 화제가 됐던 민종기 당진군수의 비리는 '고구마 넝쿨'을 방불케한다. 관내 한 업체에 100억원대의 공사를 몰아주고 3억원짜리 별장을 뇌물로 받았고 3억3000만원짜리 아파트를 사준 부하 여직원을 통해 10억원 이상의 비자금을 관리했다.

여기에 용인 약 230㎡(70평) 아파트 분양대금 12억2000만원을 건설업체가 대납하게 한 혐의까지 새로 밝혀졌다. 민 군수는 지난달 24일 인천공항을 통해 중국으로 출국하려다 위조여권이 들통나는 바람에 현장에서 도주했다.

그는 지난달 28일 서해고속도로에서 시속 200㎞로 내달리다 서울 도심에서 수사관들과 한밤의 레이스를 벌이기도 했다. 이번 선거에 나섰던 민 군수의 플랫카드엔 "한 번 더 맡겨주십시오. 으뜸 당진 완성하겠습니다"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2006년 출범한 민선 4기 기초단체장 230명 가운데 군수를 비롯한 97명이 비리나 위법 행위로 재판에 넘겨졌다. 20명이 넘는 군수가 '비리 인물'로 낙인 찍혔다. 대체 군수가 어떤 자리이기에 뇌물 바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까.

군은 시나 구보다 인구가 적은 대신 땅이 넓다. 군 평균 인구는 5만5000명 정도이지만, 강원도 홍천이나 인제의 면적은 서울의 3배에 가깝다. 땅이 넓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사업을 벌일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건설업체와의 유착 비리가 많은 것도 공사판이 들어설 장소가 많다는 것과 관계있다. 군수는 관사·관용차와 운전기사와 비서가 제공된다. 3급 공무원 대우로 연봉 7000만~8000만원을 받지만, 업무추진비가 1년에 3억원 정도 된다.

군수의 파워는 예산권과 인사권, 각종 인·허가권에서 나온다. 1년에 예산 2000억~3000억원을 주무른다. 국회와 정부부처에서 예산을 배정해주지만 일단 그 돈이 군 경계를 넘어서기만 하면 집행권은 군수가 갖는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의 조사 결과 기초단체장이 가진 각종 권한(인·허가권 등)은 3888개라고 한다. 상급단체인 광역단체장 권한(3727개)보다 161개가 더 많다. 주정차 단속이나 보육시설 설치, 노래방·오락실 인·허가, 도로정비 등 주민생활 밀착형 행정부터 지역 대형 건설사업 인·허가까지 군수 손아귀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역 영주' '소통령'으로 불리며 장관 자리보다 낫다는 말을 듣는다.

군수는 500~800명쯤 되는 공무원에 대한 인사권을 갖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매관매직도 가능하다. 한용택 옥천군수는 승진 상납금으로 수억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부하 공무원에 대한 장악력이 특히 강한 곳이 군이다.

6월 지방선거에서 경쟁 후보가 없어 무투표 당선이 확정된 기초단체장은 8명이다. 이 가운데 군수가 6명이다. 시장은 1명도 없고 나머지 2명은 구청장 후보다.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군수는 집권 4년간 지역 공무원을 꽉 잡게 된다. 거기에다 시골의 정서는 보수적이다. 그러다 보니 현직 군수에게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군수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다음 선거다. 공천만 보장받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그래서 지역 국회의원에게 '정성'을 기울인다. 이범관 한나라당 의원에게 현금 2억원을 전달하려다 이 의원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현행범으로 잡힌 이기수 전 여주군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런 이 의원도 최근 이 전 군수를 위해 탄원서를 써주는 등 구명운동에 나섰다. 이 전 군수가 구속되자 지역 공무원을 비롯한 여주 민심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요즘은 군수 눈치 보는 게 국회의원이다.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지역 정서상 어지간한 일은 눈 감고 지나간다. 언론과 시민단체 조명 밖이다 보니 어두운 곳이 군이다. 대통령 말을 듣겠냐, 국회의원 말을 듣겠냐. 조선시대 사또는 암행어사라도 조심하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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