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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한국산업보안한림원(이하 한림원) 회장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 포스코 사옥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 같이 말했다.
한림원은 국가정보원의 제안으로 지난 2018년 산업계와 법조계 산업보안 최고 전문가들이 참여해 만든 산업보안 단체다. 삼성을 비롯해 SK, LG, 현대, 포스코 등 11개 주요 대기업 정보보호 임원들과 김&장, 태평양, 세종, 율촌, 화우 등 6대 로펌 정보보호분야 전문변호사들이 회원이다.
◆사모펀드 동원 지분 확보도..기술유출 수법 다양화
기업과 정부 차원에서 국가 중요산업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기술을 빼돌리기 위한 수법도 다양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고액연봉과 유럽·북미 등 선호도가 높은 지역에서의 근무 보장, 주택과 자녀 학비를 제공 등을 미끼로 핵심 인재를 스카웃하면서 주요 기술을 탈취하는 게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직접 전면에 나서지 않고 협력업체를 활용해 납품 샘플을 요구하거나, 사모펀드 등을 통해 탈취하려는 기술을 보유한 회사나 모회사 지분을 확보한 뒤 기술을 빼돌리는 수법도 자주 쓰인다고 한다.
산학협력 공동 연구를 빙자해 국내에 연구소를 설립한 후 이를 기술수집 거점으로 활용하거나, 전문 리서치 혹은 컨설팅 업체를 활용해 기술정보를 수집한 사례도 있다.
기업들은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다양한 자구책을 펼치고 있지만, 한계는 분명하다.
김 회장은 “현재로서는 정보 기관과 연계해 핵심 기술자들이 해외 브로커 등과 접촉하는지를 모니터링하는 게 최선인 상황”며 “파격적인 보상으로 핵심기술을 보유한 인재 이탈을 막는 게 근본적 해법이지만 중국 기업들이 압도적인 자금력을 앞세워 인재들을 빼가는 통에 애국심과 양심에 호소할 수 밖에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기술유출→산업경쟁력 약화→일자리 감소 악순환
김동호 회장은 핵심기술 유출은 산업계를 넘어 나라 경제를 흔들 정도의 중대한 사안인 만큼 정부차원에서 적극적인 대응 노력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회장은 삼성전자 전직 임원이 반도체 기술을 유출해 중국에 복제 공장을 만들려고 했던 시도를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이 통째로 흔들릴 뻔한 사건”이라며 현재 같은 법제도 아래서는 언제 재발해도 이상할게 없다고 했다. 복제공장은 미수에 그쳤지만 이미 유출된 기술로 인한 피해는 최소 3000억원, 많게는 수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김 회장은 해외 기업들의 집중 타깃에 되고 있는 반도체 분야에서 기술유출 사건이 계속되면 대한민국이 보유한 ‘반도체 지위국’ 위상을 중국 등 후발주자들에게 뺏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 회장은 “글로벌 넘버원 산업기술을 지속 개발해 경쟁국과 ‘초격차’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경쟁국, 특히 중국과의 기술 격차가 2-3년에 불과해 우리 기술을 보호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경제안보 시대에서 중요 첨단기술 유출은 국가 기간산업을 무너뜨려 국민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개별 기업을 넘어 국가 안보까지 위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산업기술 유출 사건 중 90%는 중국 기업들이 관여돼 있다. 이들 기업이 노리는 기술은 반도체 뿐 아니라 이차전지, 바이오 등 국가 주력 산업분야다.
김 회장은 기술유출을 막기 위해 법제도를 개선해 ‘징벌적 형사처벌’을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도 미국, 중국, 대만처럼 경쟁국에 의한 조직적인 산업기술 유출 행위를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범죄로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만은 작년 국가안전법을 개정해 경제 산업분야 기술 유출도 간첩행위로 간주,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게 했으며 중국 또한 핵심 산업기술을 빼돌리다 적발되면 사형도 가능하다. 미국은 경제스파이법을 제정, 징역 3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할 수 있게 했다.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는 ‘적국’을 위한 간첩 행위만 처벌하도록 돼있는 현행 형법상의 간첩죄 대상을 동맹국·우방국을 포함한 ‘외국’으로 확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형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국가 핵심산업기술을 빼돌리다 적발되면 간첩죄로 처벌이 가능해진다. 간첩죄는 최고 사형이다.
그는“기술 패권을 다투는 미국, 중국, 대만 등 다른 경쟁국은 ‘레드카드’로 엄중 처벌해 기술유출을 시도하다 적발되면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게 하고 있어 내부자들이 기술을 빼돌릴 엄두를 내지 못해 기술 유출 사례가 많지 않다”고 전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기술유출 사건이 벌어져도 ‘옐로우 카드’ 수준의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탓에 기업 입장에서는 경쟁국 기업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서 싸울 수 밖에 없는 처지라는 게 김 회장의 설명이다.
김 회장은 “형법이 개정되면 기술을 빼돌리다가 적발되도 큰 탈이 없을 것이란 관련 임직원들의 마인드가 크게 바뀔 것”이라며 “정부 기관과 산업계에서도 우리 국가 핵심 기술을 보호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기업차원의 노력도 촉구했다. 기업은 세계적인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는 첨단산업 기술 개발 노력과 함께 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핵심산업기술을 보유, 관리하는 임직원들이 외부의 금전적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적절한 보상을 강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 회장은 한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기술이 국외로 유출되면 치명적인 국가 경쟁력 훼손으로 이어져 국가의 존립기반 마저 흔들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당장 수천억~수조원 손실이 발생하는 것도 문제지만 산업 경쟁력이 악화하면 일자리 자체가 사라지고 국가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