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8년간 박스를 만들어 온 B 중소업체는 최근 20년 된 거래처를 잃게 됐다. 이 업체는 지난 7월 오른 원지·원단 가격을 반영해 납품가를 인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메이저 제지사의 계열사는 기존 가격을 유지한 채 입찰에 참여했고 결국 낙찰을 받았다. B 업체 대표는 “덤핑으로 거래처를 뺏어가는 전형적인 수법”이라며 “횡포인 걸 알지만 당할 수밖에 없는 을(乙) 신세”라고 전했다.
골판지 업계가 심상치 않다. 제지사들이 골판지 원재료를 동시다발적으로 인상하면서 수천 곳 중소업체들의 아우성이 터져 나오고 있다. 시장 상황을 고려했다는 제지사들과 담합으로 맞은 수천억원의 과징금을 전가했다는 중소업체 간 분쟁은 소송전까지 치달을 전망이다. 도매가 인상은 결국 소비자 가격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데도 최순실 정국 이후 경제부처는 사실상 일손을 놓고 있어 피해가 우려된다.
◇제지사, 과징금 맞은 직후 최대 40%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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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지사들은 신대양제지 화재로 공급이 줄어들면서 원지·원단 가격이 불가피하게 올랐다는 입장이다. 지난 6월 9일 신대양제지 시화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월 3만4000t 규모의 생산 차질이 발생했다. 이 공장은 국내 연간 골판지 원지 생산량의 약 10%를 담당한다.
A 제지업체 고위관계자는 “화재로 공급이 준 데다 동남아·중국으로의 폐지(골판지 원지·원단의 원료) 유출도 많아졌다”며 “이런 전반적인 내수 물량 부족 때문에 지금도 가격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B 제지업체 관계자는 “하반기에 폐지 가격이 올라갈 상황을 인상 요인으로 미리 반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스를 제조하는 중소업체들은 이 같은 해명을 믿지 않는 분위기다. 화재 등으로 인한 돌발변수를 감안하더라도 최대 40%씩 동시에 원가를 인상하는 건 납득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게다가 인상 시점 직전에 골판지 원료 가격은 오히려 하락했다. 한국환경공단에 따르면 올해 6월 폐골판지와 펄프(활엽수 표백) 수입단가는 각각 t당 212달러, 504달러로 작년 6월(각 234달러, 619달러)보다 내려갔다. 국내 폐지(골판지 기준)의 kg당 가격도 올해 6월 77원으로 작년 6월(91원)보다 낮았다.
◇조용한 공정위..중소업체 “줄도산 우려”
중소업체들은 가격 인상 직전에 5대 메이저 제지사들이 무더기로 과징금을 맞은 데 주목하고 있다. 지난 6월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들 제지사들이 2007년부터 2013년까지 6년간 담합한 사실을 적발, 1039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지난 3월 담합 혐의로 부과한 과징금(1108억원)까지 포함하면 이들 제지사에는 올해에만 2148억원 과징금이 부과됐다. 당시 공정위는 과징금 조치로 박스 등 가격인하 효과가 있을 것으로 전망했지만 오히려 업계 분쟁이 불거지는 상황이다.
박스 제조업체 관계자는 “메이저 제지사들은 과징금이 손실로 재무제표에 반영되기 때문에 연내에 이를 메워야 하는데 소매가를 인상하는 건 부담스럽다”며 “이 결과 원지·원단 가격을 알음알음 올려 을(乙) 위치인 중소 박스업계에 과징금을 전가하고 거래처를 뺏는 방식을 택했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A 제지업계 고위관계자는 “제지업계 자진신고로 과징금을 맞은 뒤 5대 메이저들이 서로 원수가 돼 서로 전화도 인사도 안 한다”며 “멍청이도 아닌데 거래처를 뺏으려고 출혈경쟁을 할 리 없다”고 반박했다.
정부는 일단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신고를 접수한 공정위의 관계자는 “법 위반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가격 인상 사유, 시기, 일치 정도 등을 전체적으로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며 “업계 사정을 계속 듣고 보고 있다. 지속적으로 모니터링 하고 향후 조사 시 (신고 내용을) 참고하겠다”고 말했다. 최재한 한국박스산업협동조합 전무이사는 “이대로 가면 영세한 박스 제조업체들이 줄도산하게 돼 필요 시 소송도 불사하겠다”며 “과징금이 중소업체, 소비자에 전가되지 않도록 시급히 담합 관련 조사를 해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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