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타계로 우리 정치사에서 ‘3김 시대’로 기억되는 파란만장한 하나의 단락이 역사 속으로 묻히게 됐다. 군부독재에서 민주화투쟁으로 이어지는 전환기의 주역들이 모두 사라져간 것이다. 그의 정치 궤적이 다른 두 김씨인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비슷한 것도 아니다. 육사 출신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5·16 주체세력으로 군림했다는 사실부터가 다르다. 그러면서도 집권층 내부에서 끊임없이 견제를 받았고, 결국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3김이라는 묶음으로 자리 매김하게 된다.
하지만 김 전 총리의 야망은 번번이 ‘권력 2인자’ 자리에서 그치곤 했다.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 라이벌인 두 김씨가 차례로 대통령에 올랐고, 그 자신 한때 킹메이커로서 정권 창출의 산파역까지 맡았으나 극심한 지역구도 속에서 더 이상 입지를 확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서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싶다”는 표현도 이러한 아쉬움을 드러낸 것이라 여겨진다. 그만큼 과거 정치사에서 김 전 총리만큼 영욕을 경험한 사람도 드물다 ‘풍운아’라는 별명에서도 드러나는 사실이다.
지난날 주역들의 퇴장으로 ‘3김 시대’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과연 우리 정치가 과거에 비해 얼마나 나아졌는지 돌아보게 된다. 민주화투쟁 당시 학생·시민들이 최루탄을 맞아가며 쟁취하려던 민주화는 제대로 이룬 것인가. 민주화를 이뤘다는 안이한 생각에 또다른 나태함에 빠진 것은 아닌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촛불시위 끝에 탄핵이 이뤄졌고 정권이 바뀌는 변혁까지 경험했지만 그것이 종착역은 아닐 것이다. 소신도 철학도 없이 자기 이해관계에만 급급한 정치인들이 여전히 활보하는 상황이다.
물론 김 전 총리라고 모든 행적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대통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언급에서는 민감한 처세술마저 엿보인다. 그러나 험난한 권력투쟁 속에서 늘 의연하고 여유있는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많은 국민들로부터 관심과 지지를 받은 것이 사실이다. 정치인들이 역사 앞에 겸허해야 한다는 교훈도 남겨줬다.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시점에서 과거의 ‘통 큰 정치’가 새삼 그리워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김 전 총리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