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물폭탄에 반지하에서 살던 장애 가족 4명이 숨지면서, 공정은 가난과 장애 이미지로 소비되기에 바빴다. ‘한국적 주거 불평등의 상징’부터 서울시의 ‘반지하 퇴출 정책’ 등장까지. 일제히 반지하에 살던 경험을 쏟아냈다. 일각에선 가난 혐오로도 번졌다. 반지하 커밍아웃(?)이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반지하 전문가였구나, 그렇게들 반지하에 관심이 많았구나, 낯설고 생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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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公正). 최근 몇 년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시대정신이다.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대통령을 결정하는 가장 논쟁적 이슈였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에서 쳇바퀴 돌듯 ‘공회전’하는 공정은 수상쩍다. 예를 보자. 한 사교육업체가 발표한 2021년 영재학교 최종합격자 명단에 따르면, 서울과학고 정원 120명 중 66명이 대치동 같은 학원 출신이다. 경기과학고(정원 120명)는 61명, 한국과학영재학교(정원 120명)는 64명이 이 학원에 다녔다. “1등부터 100등까지 정확하게 줄 세우는 입시가 가장 공정하다”고 말하는 한 ‘강남 엄마’의 인터뷰는 섬뜩하다. 공정이라 쓰되, 능력주의라 읽어도 틀리지 않다.
책 ‘공정 이후의 세계’ 저자 김정희원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알아서 ‘각자도생’하게 내버려 두는 그것이 공정이라고 말하는 한국 사회가 과연 올바른 사회인지” 되묻는다. 그러면서 대안 담론을 제시하지 못하는 정치권을 겨냥한 날선 비판도 잊지않는다. 그는 “공정 경쟁에 대한 맹신이 도리어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차별과 불평등을 심화한다”며 “차별과 혐오를 통해 기득권을 누리는 집단(정치권)이 공정 담론을 무기화하고 있다”고 일갈한다.
김정희원 교수는 ‘페미니스트의 귀’를 강조한다. ‘기승전-공정’의 시대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들리지 않는 다른 주파수의 이야기를 찾아 듣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페미니스트의 귀는 자동적으로 생기는 게 아니다. 공감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 생각의 판단을 유보하는 노력이고, 귀를 여는 훈련인 동시에 성취”라며 “세상이 ‘공정’을 들이밀 때 이제 다른 질문으로 되받아치자. 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옆을 보고 대화를 시작하라”고 충고한다.
“성평등과 페미니즘이 중요하면 자기 돈과 시간으로 하라”는 여당 원내대표, “정당에 아름다운 여성 이미지가 필요하다”는 대중작가, ‘재난을 홍보 도구로 전락시킨’ 대통령실 참모진, 그리고 공감의 귀를 닫은 사람들이여, 이 책 꼭 읽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