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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종호 기자] 일본 정부가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노역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수출규제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에 사용하는 핵심 소재 3개에 대한 수출 절차를 강화한 것이죠. 여기에 기계와 자동차, 화학 등 다른 분야에서도 규제를 확대할 조짐을 보이면서 삼성전자(005930)와 LG전자(066570), SK하이닉스(000660) 등 국내 주요 대기업은 그야말로 비상 경영 체제에 돌입했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기업들은 단기적으로 일부 소재를 국산으로 대체하거나 중국과 대만 등 다른 국가에서 공급받기로 했습니다. 공장에서 제품 생산을 중단하는 일은 막기 위해서죠.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것이 단기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읍니다. 우선 바로 대체 가능한 국산과 중국산, 대만산 등 소재는 일부에 불과합니다. 또 새로 확보한 소재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장기간 테스트 기간도 필요합니다. 소재 변경에 따라 생산 수율은 물론 제품 품질까지도 떨어지는 결과가 생길 수도 있죠.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가 마무리되면 우리 기업이 다시 일본산 소재를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합니다. 일본산 소재의 신뢰성은 쉽게 따라가기 힘든 수준이기 때문이죠.
정부는 부랴부랴 핵심 소재 등의 국산화를 적극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국산 소재를 쓰는 기업에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소재 산업 생태계 조성에도 투자한다는 계획입니다.
그런데 국내 기업이 소재 국산화를 위해 노력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과거 미국과 일본, 미국과 중국 간 무역 갈등을 지켜보면서 소재의 중요성을 깨닫고 정부 지원을 받아 국산화를 지속 추진해왔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바로 특허 때문이죠. 사실 소재 가운데 일반 저가 소재의 경우 그간 상당 부분 국산화가 이뤄졌습니다. 문제는 첨단 고가 소재입니다. 일본은 탄탄한 기초과학 연구를 토대로 수십 년간 고품질 소재 개발에 심혈을 기울여왔습니다. 그 결과 핵심 소재 등에서 세계적으로 수많은 특허를 보유 중이죠.(일본이 우리나라에 등록한 소재 등 기술 분야 관련 특허는 무려 5만여개에 달한다고 합니다.)
소재 국산화에 나서는 기업은 결국 일본이 보유한 특허를 아슬아슬 피해 기존 일본산 소재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소재를 개발해야 합니다. 이 과정은 문과인 제가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미친(?) 난이도라고 합니다. 일각에서는 우리나라와 일본 간 소재 기술 격차가 20년 이상 벌어져 있다고 평가합니다. 일본산 소재를 뚝딱 대체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얘기죠.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기업과 정부가 힘을 모아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계획하에 첨단 소재 국산화를 추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간 우리가 등한시해온 기초과학에 대한 끈기 있는 투자와 연구부터 선행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를 기반으로 핵심 소재와 원재료 등의 국산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죠.
또 작은 소재 기업의 경쟁력을 키워 산업 생태계를 육성하는 것은 물론 대기업도 소재를 적극 개발할 수 있도록 지나친 환경 규제나 일감 몰아주기 규제 등을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이번 주 일본의 수출 규제 이슈를 취재하면서 현장에서 만난 전문가 중에는 “차라리 잘 됐다”고 말한 이들이 꽤 있었습니다. 일본이 소재를 무기로 우리를 압박하는 것은 언젠가 일어날 수밖에 없던 시나리오였다는 것이죠. 이번 사태를 정부 간 대화를 통해 잘 해결한 이후 두 번 다시 일본이 소재를 쥐고 흔들 수 없도록 철저히 대비하자는 주장이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한일전에 강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정부와 기업이 이번 사태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성장하는 계기로 삼을 것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