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현실이 더 연극 같아서 일까. 2017년 연극계는 실화(實話)를 파고든다. 최근 대학로에 오르는 작품 10편 중 반 이상이 실제 이야기에서 따왔을 정도다. 예년보다 소재와 형식은 다양해졌다. 역사의 변곡점을 이루거나 우리 사회에 파장을 일으킨 굵직한 사건을 소환해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고 나아가 대안까지 질문하는 식이다.
연극평론가는 “지난해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태와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최근 1년 사이에 사회 비판이나 현실을 풍자하는 작품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며 “새로운 세상을 향한 고민들이 만나 서로 연대하고 다양한 담론을 재생산해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허구는 실제했던 인물과 사건만큼 스토리텔링에 설득력을 갖긴 힘들다”면서 “적시에 동시대의 문제를 이끌어내기 위해 실화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실화 소재 연극의 장점은 현실에서 동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어서 관객의 몰입과 공감이 쉽다는 점이다. 가려져 있던 인물을 새롭게 조명하고, 익히 알던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맞닥뜨리는 재미도 있다. 실화라고 해서 그대로를 다 옮겨놓는 건 아니다. 사건을 겪은 이의 심리 변화에 주목한다거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되 허구의 인물을 끼워넣던지 아예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작품도 있다.
△실명 등장…다큐연극 새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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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등장인물 모두 실명을 쓴다는 점이다. 심지어 진짜 아내인 배우 이소영이 주인공 재엽의 아내 역과 딸 아론(인형) 역을 맡아 재미는 물론 몰입감을 높인다. 김재엽 연출은 “실명을 쓰려고 당사자들에게 허락을 받았다”며 “한 개인이 나라 밖에서 느낀 감정들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싶었다. 또 개인의 정체성이 세계와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등을 코멘터리 식으로 들려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극의 구성을 보면 시간의 흐름 같지만 생각의 움직임이다. 김재엽은 “밖에서 보니까 잘 보이더라. 우리 사회 모습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됐다”며 “세월호 속 우리는 국민이기보다 ‘난민’이었다”고 했다. 세계시민·이주민·난민의 시각으로 바라본 한국 속 깊은 상처를 어떻게 봉합해 나갈 것인지 묻는다. 소통 가능한 공동체를 위한 예술의 역할을 다층적으로 짚었다.
△모티브만 따왔다…풍자의 재미
‘신인류의 백분토론’(7월9일 아트원씨어터 3관)은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 ‘손석희의 100분 토론’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과학·사회·종교 각계의 인사들이 패널로 나뉘어 실제 100분간 열띤 토론을 펼친다. 주제는 ‘창조론과 진화론 중 어느 쪽이 타당한가’다. 유머러스한 설정 뒤 예리한 대사들은 상당한 흡입력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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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연출을 맡은 민준호는 “100여권, 100여개의 영상 자료를 찾아봤다. 배우들과 강의도 직접 들었다”고 했다. 이어 “우리 사회는 내가 포함된 한쪽만 보는 경향이 짙더라. 적절한 편집을 통해 철학적 내용은 빈약하겠지만 이 극을 통해 객관적인 생각과 사고를 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극단 고래의 연극 ‘불량청년’(6월11일까지 30스튜디오)은 일종의 팩션(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장르)이다. 2017년 28세의 알바청년 ‘김상복’이 광장 시위에 휘말려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다가, 1921년 경성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다. 상복은 그곳에서 ‘불령선인 김상옥’으로 오인돼 고초를 겪다 점점 빠져든다. 이해성 연출은 100년 전 인물을 다시 호명하는 이유에 대해 “요즘 청년들이 어떤 감옥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더 자유롭고 당당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연극에 담았다”고 했다.
△거짓 같은 진짜 이야기…현실 축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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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8월 24일 남태평양에서 조업 중이던 참치잡이 원양어선 ‘페스카마 호’에서 조선족 선원 6명이 한국인 선원을 포함한 11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 교포를 변론해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켜 화제가 됐지만, 이 사건은 문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으로 꼽히기도 했다. 경상도 방언과 조선족 말씨, 전라도 방언은 물론 배의 공간적 특성을 무대에 잘 풀어내 극의 갈등을 극대화시켰다.
28일 막을 내린 연극 ‘이등병의 엄마’는 지난 26일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몰래 관람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며 화제가 됐다. 의문사로 사망한 국군 장병 유가족들의 사연을 담는다. 극 막판에는 실제 군 의문사 유가족들이 무대에 올라 직접 연기한다. 극작한 고상만 작가는 “군 유족이 받은 ‘최초의 국가적 위로’”라고 평가하면서 “연극이 가진 힘”이라고 했다. 평론가는 “해석 차이·왜곡 정도에 따른 논란이 있지만 실화극은 상처를 공유하며 사회적 메시지까지 더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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