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 "대중이 뉴스 원해? 뉴스가 대중 더 원해!"

오현주 기자I 2014.08.07 07:04:00

뉴스 탐닉시대에 필요한 ''뉴스 사용설명서''
끔찍한 사건 보며 위안 삼고
연예인 가십에 흥분하는 대중
자아성찰하며 지혜 얻는 자세 가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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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알랭 드 보통|304쪽|문학동네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만약 당신이 한 나라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미술관, 교육부 또한 유명 소설가의 집으로 향하지 마라. 정치체의 신경중추인 뉴스본부로 당장 탱크를 몰고 가라.”

이건 선언이다. 세상을 뒤집는 혁명성이 필요하다는 일갈. 그렇다면 그 대상은 무엇인가. 뉴스다. 누구든 매일 매시간 쫓기듯 챙긴다는 그 뉴스. 이쯤되면 묻고 싶은 게 피어날 게다. 아니 멀쩡한 뉴스에다가 왜 탱크를? 그것은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아직도 그 까닭을 모르기 때문이며, 정신의학적으로 말하자면 심각하게 중독된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찾지 않으면 미친 듯이 초조해지는 뉴스에 대한 탐닉. 이 현상에 본격적으로 딴죽을 걸고 나온 이는 알랭 드 보통(45)이다. 평범한 일상에 평범치 않은 펜을 들이대온 그간의 ‘경력’에 걸맞게 현대인의 일상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뉴스의 세계를 헤집는다. 왜 열광하는가란 분석부터 실체를 안다면 절대 그럴 수 없을 거란 냉소까지. “인류의 절반 이상이 뉴스에 넋이 나가 있는” 사정을 캤다.

대중은 어째서 뉴스에 영혼을 파는가. 보통이 내린 첫 진단은 ‘공포’에 있다. 얼마나 많은 일이 쉽게 잘못되는지, 또 순식간에 벌어지는지 너무 잘 알아서다. 아니까 눈을 떼지 못하는 거다. 가히 종교 수준이다. 사실 ‘뉴스가 종교를 대체할 때 사회는 근대화된다’. 헤겔의 말이다. 하지만 보통은 헤겔이 미처 보지 못한 부작용까지 찾아내 들이민다. 뉴스가 신앙이 누리던 권력과 지위를 차지해버렸다는 거다. 우선 시간을 통제한다. 아침엔 모닝뉴스, 저녁엔 종합뉴스가 기도시간처럼 지켜진다. 마음가짐도 요구한다. 신앙을 품었을 때와 같이 공손한 자세 말이다. 그럴 만도 하다. 뉴스는 계시를 주고, 선악을 구분하며, 타인의 고통을 알고, 자연섭리를 파악하라고 타이른다. 이 모든 의식을 거부한다면? ‘뉴스의 이단’이란 비난은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바람직한 뉴스-대중의 관계인가. 책은 뉴스 소비자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대중에게 ‘당신은 중독자일 뿐’이란 걸 일깨우려는 보통의 계산된 의도다.

▲뉴스 사용설명서 본 적 있나

뉴스가 종교와 다른 점이라면 사용설명서가 없다는 것. 어느 누구도 뉴스를 보는 방법이나 매시간 쏟아지는 뉴스 언어와 이미지를 간파하는 법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 큰 일탈이 없던 일반인이라면 정규 교육과정이 끝난 다음 바로 뉴스라는 거대한 통로에 내던져진다.

그럼에도 뉴스가 개인에 미치는 파급력은 대단하단다. 왜냐고? 공적인 삶의 풍조를 이끄는 거의 유일한 힘이라서란다. 개개인의 담 밖에서 돌아가는 모든 일과 가능한 변화를 알려주는 건 물론 정치·사회에 대한 감각까지 키워내니까. 그러니 혁명을 꿈꾼다면 탱크를 몰고 뉴스본부로 쳐들어가라고 할 수밖에. 약점이 있다면 뉴스는 스스로 “우린 그저 보도만 하는 것이 아니다”란 양심선언을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조차 꾸준히 순위 매기는 일로 보완할 수 있다. 뉴스에 구획이 생기고 줄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흥분은 주지만 지혜는 주지 않아

대중이 뉴스 찾기에 혈안이 된 데는 자기최면도 있다. 연쇄살인사건이나 부패한 정치인, 기행을 일삼는 연예인의 가십을 접하면서 ‘내 삶이 그나마 정상’이라고 안도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뉴스가 대중에게 주려는 게 정말 이것이냐는 거다. 대중은 뉴스에서 흥분과 두려움을 얻는다. 엄청난 양의 정보도 얻는다. 그러나 정작 지혜를 얻기는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이 와중에 뉴스가 상업적인 이득만을 위해 덤빈다면? 대중의 불안과 분노를 책임없이 양산한다면? 선정적인 기사를 내세워 중대한 현실로부터 대중의 눈길을 거둬 간다면?

뉴스와 대중이 생산자와 소비자의 입장에서 머리를 맞대는 진지한 고민이 이 지점서 필요하다고 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통이 생각하는 기자는 큰 그림 혹은 어젠다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인류의 과제가 ‘더 살기 좋은 세상 만들기’에 있다면 뉴스가 기여를 하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굳이 중립성에 목매달 필요도 없다고 했다. 되레 편향성이 건강한 것이라고 했다.

▲뉴스에 넋 나가 있는 대중 습관 비틀어

보통의 목적은 넋 놓고 뉴스를 바라보는 대중의 습관을 비틀어버리는 데 있었다. 더이상 뉴스가 독창성이나 이즘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아채야 삶이 더 풍요로워진다고 했다. 그러곤 이 ‘진취적’ 행위가 뉴스를 건강하게 수용할 수 있는 출발점이란 데 방점을 찍었다. 뉴스란 것이 세계와 나, 타인과 나의 진정한 만남을 이루게 하기 위한 중매인이 돼야 한다는 확신에서다.

좀더 드라마틱한 결론을 기대했다면 실망스러울 수 있다. 발은 현실에 뒀지만 머리로 만든 유토피아가 명확히 잡히지 않는 탓이다. “사회의 기쁨과 고통에 반응하고, 더불어 사는 일에 대한 이상적·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그 역할을 뉴스에서 찾은 셈이니.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했다. 자의식을 가지고 뉴스를 받아들일 때 보상은 따라온다는 거다.

지구촌에서 뉴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이젠 거의 없다. 그러니 대중이 뉴스를 원할 수밖에 없다? 천만에. 그래서 뉴스가 대중을 더 원한다. 겁먹고 동요하는 대중이라면 더더욱. 외딴섬 로빈슨 크루소가 돼도 뉴스 사용설명서가 필요하단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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