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버넌스(민관협력·협치·행정), 세일즈 외교(경제 외교), 가이드라인(지침), 글로벌 스탠더드(국제표준·국제기준) 등. 정부 부처가 국민에게 발표한 공식문서에 자주 등장한 외래어 표현들이다.
공공언어가 어렵다는 지적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예전에는 어려운 한자어 남용으로 공문서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면, 요즘엔 영어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처지다. 올바른 국어 사용에 앞장서야 할 정부가 배포하는 보도자료나 일부 기관장의 발언들을 보면, 과도한 외국어 오·남용 사례가 여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글문화연대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8월까지 중앙정부기관(47개 부처·청·위원회)에서 낸 보도자료 1만1918건을 살펴본 결과, 절반 수준인 5501건의 외국어 표현·표기 남용이 확인됐다. 중앙행정기관 보도자료에서 사용한 로마자 용어 상위 5개는 FTA(자유무역협정·427회), TF(특별전담팀·394회), R&D(연구개발·327회), EU(유럽연합·302회), AI(인공지능 혹은 조류인플루엔자·179회) 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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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연말 열린 제12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도 “어그레시브(aggressive·공격적인)한 2023년”이라는 표현을 써 야권에서 고위 공직자들의 영어 사용 자중을 요구하기도 했다. 임기 초 2022년 6월 국민의힘 지도부와의 오찬회동에서는 용산공원 조성계획을 설명하던 중 “이름을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로 지으면 좋겠다”며 “영어로 하면 멋있는데 국립추모공원이라고 하면 멋이 없어서 우리나라 이름으로는 무엇으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 바 있다. 일각에선 정부가 오히려 외국어 사용을 권장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다만 성과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윤 대통령 취임 이후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던 ‘도어스테핑’(door stepping)은 최근 많은 언론이 ‘출근길 문답’으로 쓰면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한국문화연대에 따르면 정부 기관의 외국 글자 표기는 2021년 전체 6만3561회(중앙 2만9377회, 광역 3만4184회)에서 2022년 4만5931회(중앙 2만2751회, 광역 2만3180회)로 떨어져 28%가 줄었다.
한글문화연대는 로마자 줄임말 용어부터 쉬운 우리말로 고쳐 쓰면 개선 및 파급 효과가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 로마자가 그대로 노출된 용어 가운데 ‘GDP’(국내총생산) 정도를 제외하고는 일반 국민과 공무원 모두 로마자 용어를 어렵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게 이 단체 측의 설명이다.
세종국어문화원은 “언어는 먹이사슬처럼 강자가 약자를 지배한다”며 “이미 권력이 된 영어의 오·남용 사례를 그대로 두면 결국 우리말이 설 자리를 잃게 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