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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구 회장은 당시 소학교 교사였던 부친 구자경 명예회장에게서 엄격한 규율과 예의범절, 가족간의 화합과 형제간의 우애 등을 배웠다. 이후 1950년 부친인 구 명예회장이 조부인 구인회 LG 창업회장의 부름을 받고 락희화학에 합류하고 나서는 두 어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구 회장은 어린 시절에 대해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공장 구경을 갔을 때 땀 흘리며 비누와 ’동동구리무‘를 만들던 직원들이 생각난다. 할아버지는 사업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으로 현재 LG의 사업틀을 구축했고, 부친은 그 사업 기반을 굳게 다지셨다”고 회고한 적 있다.
◇구자경 명예회장 4남2녀 중 장남
구 회장은 연세대 상경대학 재학 중 육군 현역으로 입대해 병장으로 만기전역했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 애쉬랜드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클리블랜드 주립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5년 럭키(현 LG화학) 심사과 과장으로 입사해 첫 근무를 시작한 뒤, 영업, 심사, 수출, 기획 업무 등을 거치면서 20여 년간 차곡차곡 실무경험을 쌓았다. 총수 일가라 해도 철저한 경영수업을 통해 실무 능력을 검증받아야 한다는 LG가(家) 전통에 따른 것이다. 경영수업 기간이 길었던 만큼, 구 회장은 취임 당시 경영자로서 기초가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구 회장은 1989년 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본격적으로 경영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부회장으로서 그의 역할은 중요 정책을 수립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회장을 보좌하는 한편, 각 사의 경영현황을 파악하고 지원하는 것이었다.
부회장 시절 그룹 기술자문위원회 위원장과 해외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도 맡아 그룹의 전략적 과제인 ’기술개발력 제고‘와 ’국제화 추진‘을 적극 주도했다. 세계적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회사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핵심기술을 명확히 하고 역량을 집중시키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50세 때 LG그룹 3대 회장에 오르다
1995년 2월 22일, 구 회장은 50세가 되던 해에 부친인 구자경 명예회장이 경영일선에서 은퇴하며 LG그룹 3대 회장에 취임했다. 이후 그는 특유의 ‘끈기와 결단’의 리더십으로 LG를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세우고, ‘영속기업 LG’의 기반을 탄탄히 닦았다.
회장 취임 당시 30조원 규모(1994년 말)였던 LG그룹 매출은 GS, LS 등을 계열 분리하고도 160조원 규모(2017년 말)로 5배 이상 성장시켰다. 10조원이었던 해외 매출은 110조원대로 커져 10배 이상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이 기간 국내·외 임직원 수는 약 10만 명에서 약 21만 명으로 2배 가량 늘었다. 이 가운데 약 8만여 명이 200여 개의 해외 현지 법인과 70여 개의 해외 지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구 회장은 LG 사업군을 ‘전자-화학-통신서비스’ 3개 핵심 사업군으로 구축하면서 국가 산업 경쟁력의 견인과 경제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끊임없는 도전과 혁신으로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 전기차용 배터리 등 자동차부품, 에너지, 바이오 등의 분야에서 한발 앞서 미래를 준비했던 ‘선구적 경영자’였다.
특히 구 회장은 ‘영속기업 LG’의 해답은 연구개발(R&D)과 인재라는 신념과 의지로 서울 마곡지구에 국내 최대 규모의 융복합 연구단지인 ‘LG 사이언스파크’를 완성시키는 등 아낌없는 투자와 육성에 열과 성을 다했다.
또 ‘럭키금성’에서 ‘LG’로 CI 변경을 주도하며 글로벌 선도 기업으로 도약하는 기반을 다지고, 국내 대기업 최초로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고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을 결단하는 등 영속 기업의 토대를 쌓은 인물이다.
구 회장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의 표본으로도 불린다. 국가와 사회를 위해 희생한 평범한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함께 기억하자는 뜻으로 ‘LG 의인상’을 만드는가 하면, 후대에게 의미 있는 자연유산을 남기고 싶어 본인의 아호를 딴 수목원 ‘화담(和談)숲’을 조성하기도 했다.
◇승부근성· 도전정신 강한 뼛속까지 기업가
작은 것이라도 자신이 약속한 것은 꼭 지키려 했던 구 회장은 대기업 총수임에도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이웃집 아저씨’같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경영에 있어선 누구보다 잘 싸웠던 승부사 기질이 넘쳤던 경영자였다.
그의 승부사 기질을은 골프 일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구 회장은 “내 골프 핸디는 고무줄 핸디”라며 “내기를 할 때는 잘하지만 그냥 칠 때는 잘 못한다. 딴 돈은 돌려주더라도 게임은 어쨌든 이겨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할 정도로 승부를 즐겼다.
한 번은 구 회장과 라운딩을 하던 한 외부인사가 “너무 골프를 잘 쳐 임원들이 함께 라운딩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습니까”라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구 회장이 “저는 골프를 잘 못 치거나 스코어를 가지고 누구를 탓해본 적은 없지만, 성의 없이 대충대충 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며 “뭐든 마찬가지이지만 골프 역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니냐”라고 답했다고 한다.
누구보다 승부근성과 도전정신을 중요시 했던 뼛속까지 기업가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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