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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섭 칼럼]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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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섭 기자I 2015.05.01 03:00:01
1905년 7월 일본의 총리대신이던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미국의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 사이에 맺어진 협정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통치권을 인정하는 대신 조선에서의 지배적 지위를 승인받은 협약이다. 그로부터 4달 뒤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박탈당한 것이 그 결과다.

태프트 장관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로 도쿄를 방문해 협약을 맺었다는 점에서 당시 동북아 정세를 바라보던 백악관의 의중을 짐작하게 된다. 태프트 자신도 그 다음 대통령에 올랐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합병된 것이 그의 임기 중이었지만 이 역시 미국의 암묵적 동의의 연장선에서 이뤄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역사는 반복한다고 했던가. 110년이 지난 지금 상황도 비슷하다.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한국인들에게 본능적인 피해의식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주역 배우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오바마 대통령으로, 무대가 워싱턴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더욱이 미국이 일본에 대해 과거 제2차대전의 ‘전범국’ 면죄부를 벗겨준 데서 더 나아가 ‘동맹국’으로서의 관계를 과시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백악관 만찬에 일본 요리가 등장했고, 오바마 자신은 하이쿠를 낭송했다. 일본이 미국 주도의 안보 및 경제질서에 기여한다는 조건으로 아베 총리에게 레드 카펫을 깔아준 것이다.

일본이 재무장 행보를 가속화할 수 있도록 방위협력지침이 개정된 데다 센카쿠 분쟁이 일어나면 미국이 자동 개입한다는 방침도 천명되었다. 일본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진출하도록 지원한다는 약속도 이뤄졌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충직한 대리자로 앉힌 것이나 다름없다. 태평양을 건너 마주보는 두 나라의 ‘신(新) 밀월시대’의 본질이다.

우리로서는 일본의 과거사 왜곡에 대한 분개심을 여지없이 묵살당한 셈이 되고 말았다. 3·1운동 당시 여학생 참가자들이 성고문을 당했다는 기록도 나오고 있다. 미국까지 쫓아가 “사과 받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다”던 위안부 할머니의 피맺힌 하소연도 소용이 없었다.

중재자 역할을 기대했던 오바마 대통령은 은근히 일본을 두둔하는 모습이었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 화해를 했다면 자기들끼리만 했을 뿐이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하지 않았는가. 리퍼트 대사가 흉기에 찔려 피를 흘리면서도 “같이 갑시다”고 했지만 그조차도 외교적 수사가 아니었는가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면 아베 총리의 본심은 무엇일까. 미 상·하원 합동연설을 주목했으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조차 없었다. 이미 하버드대학 연설이나 오바마와의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드러났듯이 과거사 사과는 안중에도 없는 표정이었다. 국제사회의 눈길을 의식해 “고노 담화를 지지한다”고 언급한 것이 전부다. 지난날 총리를 지낸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전범 시절을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아베를 원망하고, 오바마에게 화살을 돌릴 만큼 우리의 내부 사정이 한가롭지 않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여야 정치 지도자들은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은 있는 것인지 서로 남의 탓만 해대면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국민들도 당장 자기 밥그릇만 채워주면 그만인 것 같다. 마치 나라를 빼앗기던 그때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은가. 아베 총리의 방미 일정을 지켜보면서 가쓰라-태프트 밀약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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