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750억원이 넘는 나랏돈을 집행하는 일은 의례적이라고 해두자. 가장 무거운 역할은 기록을 쓰고 경향을 세우며 ‘큰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작가에겐 ‘영예’가 되고 미술계에는 ‘미래’가 된다. 텍스트면서 매뉴얼, 기준이면서 방향이란 얘기다. 그 정점에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있는 거다.
그런데 그 자리, 참 평탄치 않다. ‘어렵다’와는 다른 뜻이다. 말 나는 건 기본, 탈 나는 건 옵션이다. 지난 10년만 놓고 보자. 순조롭게 임용된 적이 없고, 매끈하게 유지된 적이 없으며, 깔끔하게 마무리된 적도 없다. 관장과 관장 사이, 짧게는 석 달, 길게는 1년 이상 비우는 일도 습관이 됐다.
2012년 1월 배순훈 관장 사퇴로 공석이던 자리를 정형민 관장이 채웠을 땐, 처음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이듬해 서울관 개관 즈음 구설이 삐져나왔다. 개관전에 서울대 출신 작가의 작품을 80% 이상 걸고, 제자·지인으로 학예사 자리를 채운 게 드러난 거다. 그해 12월 임기가 슬쩍 연장되자 논란은 타올랐다. 결국 2014년 10월 채용비리 등으로 직위가 해제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1년여는 ‘관장 찾아 삼만리’였다. 결국 마지막 카드로 스페인 출신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이 불려나왔다. 미술계는 불난 호떡집이 됐다. 외국인이란 게 문제였다. ‘한국미술은 좀 아나’ ‘민족정체성은 물 건너갔네’ 등 비아냥이 요란했다. 2015년 12월 임명 뒤엔 비아냥으로 끝나지 않았다. 때려대기 시작했으니. 결국 3년 내내 두들겨 맞다가 임기를 끝냈다. 조심스럽게 꺼낸 연임 의사는 핀잔만 받고 묵살됐다.
그 뒤는 2019년 2월, 윤범모 관장이 이었다. 이때라고 평탄했을까. 이번엔 ‘코드인사’ 논란이 불거졌다. 후보자 대상의 고위공무원단 역량평가에서 낙제점을 받아 탈락했는데도 재평가 기회를 얻어 최종 선발된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정권이 내정한 인물이란 거였다. 그런데 이 ‘코드’가 끝내 윤 관장의 발목을 잡았다. 지난해 2월 연임에 성공한 윤 관장을 올해 4월 중도사퇴케 한 것도 결국 ‘바뀐 정권의 눈 밖에 나서’라고들 했으니까.
그렇게 다시 여기까지 왔다. 석 달간의 침묵을 깨고 지난주 인사혁신처에서 운을 뗐다. 후보 5명이 서류전형을 통과했고, 20일 면접시험 뒤 다음날 임용후보자(통상 3명)를 발표하겠다고. 그중 1인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임명하는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되는 거다.
과연 이번에는? 그다지 낙관적이진 않다. 이미 ‘정권과의 친분이 조건’이란 얘기가 돌았으니 말이다. 그러니 ‘누구’에 대한 기대보다, ‘얼마나’에 대한 우려가 클 수밖에. 초 치자는 얘기겠나. 트라우마 때문이다. 자질·능력은 둘째치고, 관장 임용의 잣대가 예술인지, 행정인지, 정치인지 헷갈려서 하는 얘기다. 이젠 감동적인, 아니 현실적인 작품이 미술관에 걸릴 때가 되지 않았나. 비현실·초현실주의는 그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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