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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 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내 장차 월노에게 내세워 명부에 소송을 내서라도 / 다음 생에서는 부부가 바꿔 태어나 / 나는 죽고 당신은 천리 밖에 살아있으니 / 그대로 하여금 내 설움을 알게 되리라” 추사 김정희가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도망시’(悼亡詩)다. 그 슬픔이 얼마나 컸으면 이렇게 표현했을까. 그는 평생 40통의 한글 편지를 남겼는데, 그중 38통을 그의 아내에게 보냈다. 나머지 2통은 며느리에게 쓴 편지였다. 추사는 병약한 아내의 건강을 늘 걱정했다. 추사의 한글 편지 대부분은 아내에 대한 염려로 채워져 있다. 때로는 반찬 투정하는 철부지 추사의 모습도 담겼다. 이에 부인은 매년 정성스레 반찬을 마련하고, 의복과 함께 보내주었다. 그만큼 이 부부 금실은 남부러울 정도였다. 예술과 학문에는 오만한 정도로 깐깐하고 엄격했던 추사의 인간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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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손때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추사고택’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대표적인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 그의 고향은 충남 예산이다. 그가 나고 자랐던 집도 신암면 용궁리에 있었다. 예산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인 추사고택이다. 야트막한 용산(오석산, 74.3m) 발치 비탈에 자리했다. 그 앞으로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이 집을 지은 이는 영조 사위인 김한신이다. 김한신은 88명의 사위 후보를 면접한 영조의 눈에 들어 화순옹주와 결혼했다. 이 부부가 바로 김정희의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다. 당대 최고의 ‘금수저’ 집안이었던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을 보낸 영조는 사위를 위해 이 집을 지었다. 당시, 충청도 53개 군현에서 한 칸씩 건립 비용을 걷었을 정도로 그 위용이 대단했다. 수백년이 흘러 고택은 단아한 모습을 갖고는 있지만, 당시의 위세나 탁월함은 잃어버렸다. 1970년 흉물처럼 방치됐던 고택을 복원하면서 규모 또한 절반 이상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그 어디에서도 기품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옥의 미는 여전히 흐르고 있다. 여기에 추사의 필체로 적힌 주련과 아름다운 글씨와 의미를 되짚어보는 것만으로도 속세의 번잡한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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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화단을 ‘ㄱ’자로 두른 사랑채다. 화단에는 추사가 해시계 받침대로 썼다는 육각 돌기둥이 서 있는데, ‘석년’(石年)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사랑채에는 온돌방이 세 칸 있고,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다. 벽에는 추사의 대표작인 ‘세한도’(국보 제80호, 국립박물관 소장) 복제본이 걸려 있다. 추사가 9년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사제의 의리를 지킨 제자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 있다. 사랑채에는 온통 추사의 글로 가득하다.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인 주련에 적혀있다. 또 방에는 병풍과 서책이 놓인 책상이 있고, 대청에는 추사의 글씨를 담은 액자들이 걸려 있다. 안채는 사랑채 뒤편에 있다. 전형적인 한옥형태인 ‘ㅁ’ 자형이다. 그 뒤로는 영당이 자리한다. 영당에는 추사의 제자이자 화가인 이한철이 그린 초상화(복제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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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와 예안 이씨,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러브 스토리’
추사 고택을 나와 오른쪽으로 우물을 지나면 추사와 두 부인의 묘가 있다. 본래는 첫 부인인 한산 이씨의 묘만 있었다. 추사와 예안 이씨는 과천에 묘가 있었다. 1937년 이곳으로 이장해 세 명을 합장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추사는 15세 때 동갑인 한산 이씨와 결혼했지만, 그의 부인은 20살의 나이로 사별했다. 23세 때 두 살 아래인 외암마을 예안 이씨(외암 이간의 증손녀)와 재혼했다. 그렇게 20여년을 함께 살다, 추사가 제주로 유배간 지 2년째 되던 해, 예안 이씨는 먼저 하늘나라고 떠났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5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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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은 추사의 증조부와 증조모인 김한신과 화순옹주다. 김한신은 화순옹주와 혼인해 월성위라는 부마의 작호를 받았다. 영조는 사위와 딸을 위해 경복궁 영추문 바로 맞은편(현재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월성위궁을 하사했다. 하지만 김한신은 38살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아내 화순옹주는 식음을 전폐한다. 영조가 딸의 마음을 돌이키려 애썼지만 허사였다. 곡기를 끊은 지 14일 만에 화순옹주는 남편의 뒤를 따랐다. 추사고택 왼쪽에 있는 묘가 바로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묘다.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애달픈 사랑이야기다. 합장묘에서 왼쪽으로 조금 더 발걸음을 옮기면 정려문이다. 화순옹주의 조카인 정조가 내린 화순옹주 홍문이 있는 곳이다. 정조는 화순옹주를 조선 왕실이 배출한 유일한 열녀라고 칭송했다. 현재는 장려각 안쪽에 있던 사당 자리는 주춧돌만 남아 있다.
정려문에서 백송공원을 지나 조금 더 이동하면 수피가 하얀 백송나무가 묘소를 배경으로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멋진 풍경을 만난다. 이 백송나무(천연기념물 제106호)는 추사가 24세 때 청나라 연경에 다녀올 때 가져온 씨앗을 고조부의 묘소 앞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원래 줄기가 3개였으나 2개가 말라 죽어 지금 하나만 남았다. 추사의 삶과 독특한 필체의 아름다움을 조명하고 있는 추사기념관도 놓치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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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의 자취 또렷이 남은 ‘화암사’
화암사에도 추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곳에는 세월의 더께를 더한 추사의 멋진 글씨가 바위에 새겨진 채로 우릴 맞는다. 화암사는 고택 뒤편의 오석산(烏石山)에 자리한 오래된 사찰이다. 삼국시대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김한신이 부마가 돼 일대의 전토를 하사받았을 때 오석산이 포함되면서 화암사는 추사 문중에 세습됐다. 산과 절의 이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듯이 이곳에는 바위가 유난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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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은 추사 집안의 원찰이었다. 원찰은 조상들의 명복이나 살아 있는 이들의 소원을 비는 사찰이라는 뜻이다. 화암사의 구조는 일반 사찰과 달리 조선 시대 민가의 한옥 같다. 안채와 사랑채가 합쳐진 것 같은 요사채가 전면에 서 있고 누마루가 돌출해 있다. 화암사에서 불교를 공부한 추사는 제주도 유배 시절인 1846년 편지를 보내 중건을 지시하고, 무량수각과 시경루 현판을 직접 쓰기도 했다. 무량수각과 시경루의 친필 편액은 수덕사 근역성보관에서 만날 수 있다.
양반집 별당 같은 느낌이 드는 요사채를 지나 대웅전 뒤편으로 돌아가자 병풍바위가 나타난다. 먼저, 이 바위에 힘차게 새겨진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에는 ‘시흥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경지’라는 뜻의 ‘시경’(詩境)과 ‘부처의 집’이라는 뜻의 ‘천축고선생택’(天竺古先生宅)이라는 암각문이 나그네를 맞는다.
등산로를 따라 동쪽으로 약 200m를 올라가면 그곳에 또 바위에 새긴 추사의 글씨가 있다. ‘소봉래(小蓬萊)’라는 세 글자였다. 추사가 오석산을 얼마나 아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에게 이 산은 ‘작은 금강산’이었다. 그렇게 작은 금강의 흥취를 느끼는 사이 날이 어두워졌다. 오석산을 내려오는 길.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만 가득하다. 추사가 생각한 이상향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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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메모
△가는길= 서해안고속도로 당진나들목에서 빠져 예산·합덕 방면으로 우측 길을 택한 뒤, 예산·삽교호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국도 32호선이다. 다시 예산·합덕 방향으로 우회전해서 신택교차로에서 옥금리·신택리 방면으로 좌회전, 이어 신택1리 방면으로 좌회전 후 추사고택로다.
△잠잘곳= 예산에는 덕산 온천지구가 있어 다른 지역보다 숙박시설이 많은 편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이 지난달 개장한 ‘리솜스파캐슬’. 최근 ‘스플라스리솜’으로 이름까지 바꿨다. 호반그룹이 지난해 리솜리조트를 인수하면서 주인이 바뀌어서다. 이번 개장을 위해 스플라스리솜은 대대적인 리뉴얼 작업을 진행했다. 워터파크 시설을 전면 정비하는 한편, 플렉스타워의 134개 객실 인테리어도 새로 단장했다. 스플라스리솜 워터파크는 어린이를 위한 물놀이 시설을 보강하고 청량한 분위기를 더했다. 야외 워터파크 2층의 토렌트리버존은 더 강한 물살과 파도로 이용객의 스릴을 극대화했다. 새 단장 기념으로 다음달 10일까지 매주 토요일 매직유랑단 공연을 진행한다. 여름방학 기간인 19일부터 28일간 영ㆍ유아를 위한 키즈파크 ‘영실업빌리지’도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