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질본·병무청, 외국산에 유리한 '입찰 기준' 고집…韓 바이오벤처 '화병'

강경훈 기자I 2019.01.24 05:00:00

가격 경쟁력 있어도 질본·병무청 등 문턱서 좌절
대한적십자사 국감서 외국기업 특혜 논란
국가기관 인증도 ‘무쓸모’…“정작 국내서 사용 안해”

[이데일리 강경훈·김지섭 기자] 경제 발전을 위해 규제개혁을 외치지만 공무원의 소극적이고 행정편의적인 태도 탓에 규제 완화는 요원하다는 제약바이오 업계의 볼멘 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내 기술을 장려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정부가 국내 제품과 기술을 외면하고 있어 국내 업체들의 개발 의지를 정부를 꺾는다는 것이다.

3년간 30억원을 투자해 지난해 잠복결핵 진단키트를 국산화한 S사는 기존 외국계 제품보다 30~40% 저렴한 가격 경쟁력을 갖고 있었지만 불필요한 규정 탓에 정부입찰에 진입조차 못했다.

200여 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을 진행해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았으나 질병관리본부가 이달 초 잠복결핵 확인을 위해 진행한 9만여명 분량의 진단키트 입찰에서 제3의 평가자료를 추가로 요구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허가받은 제품으로는 조건을 맞추지 못했고 결국 독일 제품이 단독 입찰에 참여했다.

이 회사는 병무청에서도 같은 이유로 입찰이 가로막혔다. 병무청은 올해 입영자 34만여명을 대상으로 잠복결핵 위탁검사를 위한 공개입찰을 준비하면서 참가희망 업체들에게 평가항목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잠복결핵 진단 시장 중 가장 규모가 큰 병무청 입찰에 참가하기를 원했던 S사는 병무청 평가항목 중 기존에 쓰던 검사법과 95% 이상 일치한다는 것을 입증한 논문과, 국제적으로 공인된 국가기관 등에서 보고된 실적이 있어야 한다는 항목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병무청은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이 항목을 평가에서 제외하고 새로운 평가항목을 공개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병무청은 삭제했던 평가항목을 세부항목으로 넣으면서 배점도 가격에 대한 배점인 20점보다 높은 30점으로 높였다.

S사 관계자는 “이렇게 하면 아무리 가격을 낮게 제안해도 국산 신제품이 낙찰받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경쟁을 붙이면 가격도 떨어져 결국 국가 예산을 아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기관이 오히려 국내 업체의 진입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병무청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해당 업체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조달청과 논의해 문제가 되는 평가기준을 바꿨다는 것이다. 병무청 관계자는 “조달청으로부터 기술과 가격에 대한 동시입찰에서 협상에 의한 계약으로 변경하라는 제안을 받았다”며 “그렇게 하면 정량평가 배점은 줄어들고 정성평가에 대한 배점은 늘어나게 되는데 정성평가는 국내외 공인기관 등의 사용실적 등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데일리 김정훈 기자]
해외 제품을 어렵게 국산화해도 공공기관에서 쓰이지 않는 사례는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다중진단제품을 개발하고 있는 P사는 혈액진단 기기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대표적 공공수요처인 대한적십자사에 제품을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적십자는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677억원 규모의 면역검사시스템 구매 입찰에 대해 특정 외국 기업에 대한 특혜와 국내 업체에 대한 차별행위를 지적받는 등 의혹을 받고 있다.

P사의 한 임원은 “해외 기업이 선점하고 있는 시장에 국내 기업이 진입할 수 없다면 혁신기술을 보유한 기업들도 유니콘기업으로 성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H사가 개발한 진단장치는 혁신성을 인정받아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차세대 세계일류상품’으로 선정됐다. 이후 공공기관 등에서 사용을 기대했지만 혜택은 전무하고, 정부에서 주기적으로 요구하는 서류 등으로 불필요한 업무만 늘었다. 이 회사가 지원한 의료·소방 분야 등 입찰은 이미 해외 기업이 시장을 선점했고, 이 회사 신제품은 평가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업계에서는 ‘메이드 인 코리아’를 홀대하는 정부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국산 의료기술의 선진화, 글로벌화는 뒤쳐질 수 밖에 없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의료기기 개발사 대표는 “의료기술에 대한 국내 인허가 규제 수준은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며 “엄격한 규제를 운영하면서 정작 국내에서 허가받은 제품을 정부가 외면하면 해외에 진출했을 때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자기네 나라에서도 쓰지 않는 제품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문제제기를 하면 딱히 대응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엄격한 과정을 거쳐 허가를 받은 국산 제품은 정부사업에서라도 이를 일정비율로 의무적으로 채택하게 하면 여기서 생기는 이익을 다시 연구·개발(R&D)에 투입해 품질을 향상시키는 선순환구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병무청 잠복결핵 입찰 제안서 세부 항목 변화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