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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속으로 진화하는 프린터 기술

조선일보 기자I 2007.12.08 13:16:32
[조선일보 제공] 디지털 시대에 프린터가 각광을 받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다. 그러나 프린터에 복사기, 팩스, 유선전화 기능까지 갖춘 디지털 복합기 등으로 발전하며 프린터는 컴퓨터와 함께 비즈니스 디지털 기기의 핵심 장비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프린터가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온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흑백 잉크젯 프린터는 1970년대 후반에 개발됐고, 컬러 잉크젯 프린터는 1980년대 초반에 세상에 첫 선을 보였다.

오늘날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레이저 방식의 컬러 프린터는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등장했다. 초기엔 어떤 방식이든 한 자씩, 한 줄씩 속 터지게 인쇄했지만 지금은 화려한 컬러사진까지도 한번에 밀어붙이듯 인쇄해 버린다. 화려한 디지털 기술이 판을 치는 시대에 자칫 별것 아닌 것처럼 여길 수도 있지만 프린터야말로 디지털 기기 중 가장 진입장벽이 높은 기술집약적 분야로 꼽힌다.

■충격식 도트(dot)에서 레이저까지… 프린터 기술의 진화

초기 프린터는 타자기처럼 활자나 인쇄 핀(pin)으로 잉크가 묻은 리본에 충격을 가해 종이에 찍어내는 ‘충격식’이었다. 인쇄 핀을 사용하는 프린터는 통상 ‘도트(dot) 프린터’라 불렸고, 수직으로 배열된 핀의 수에 따라 등급이 나눠졌다. 어떤 문자를 인쇄하기 위해서는 그 문자를 구성할 핀들에 전기적 신호를 전달, 해당 핀들이 종이에 충격을 가하는 게 원리다. 그러자니 프린터 작업은 다닥거리며 항상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속도도 빠르고, 소음까지 획기적으로 줄인 방식이 바로 열이나 레이저 광선을 이용하는 ‘비충격식’ 프린터다. 널리 쓰이는 열전사 프린터, 잉크젯 프린터, 레이저 프린터 등이 이에 속한다.

이 중 가장 오랫동안 환영을 받았던 제품은 잉크 방울을 용지 위에 분사시켜 영상을 그려내는 잉크젯 프린터였다. 처음 발명된 것은 1951년 스웨덴의 엘름퀴스트(Elmquist)에 의해서였지만 정교한 성능을 보이게 된 것은 1972년 졸탄(Zoltan)이 비연속분사 ‘드롭 온 디맨드(drop on demand)’ 방식으로 압전기(Piezoelectric) 소자를 쓴 잉크젯 프린터를 고안하고, 또 1979년 캐논 사와 HP 사가 버블젯(bubble jet) 방식을 독자적으로 개발하면서부터다.

개인용 컴퓨터(PC)가 본격 보급되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는 캐논, HP에 이어 엡손(Epson)과 핫 멜트(hot-melt) 방식의 데이터프로덕츠(Dataproducts), 텍트로닉스(Tektronix) 사 등이 경쟁을 펼치며 잉크젯 기술의 급속한 발전을 이끌었다. 이후 잉크젯 방식이 프린터의 대세를 이루게 됐다.

잉크젯에 이어 고품질 사무용 프린터로 각광을 받고 있는 레이저 프린터는 1975년 IBM이 세계 최초로 상품화에 성공했다. 이어 1977년에는 제록스 사가 ‘제로그라피(Xeroxgraphy·건식현상)’ 방식을 고안, ‘제록스(Xerox)’ 시리즈를 선보이며 시장을 장악했다. 레이저 프린터는 빠른 속도와 낮은 소음, 경제성을 장점으로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레이저 프린터의 원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정전기’를 이용해 토너 가루를 종이에 압착시키는 방식이다. 레이저 프린터에는 드럼이라는 금속 원통이 장착돼 있는데, 이 드럼은 빛을 받으면 전자를 내는 물질로 만들어졌다. 이 드럼에 전기를 흘려 양(+)의 전기를 띠게 한 다음 컴퓨터가 레이저의 방향을 조절해 원통에 글씨 모양으로 빛을 비춘다. 빛을 받은 부분은 전자가 나와 음(-)의 전기를 띠게 되고, 나머지 부분은 양의 전기로 남아 있게 된다. 그 다음, 아주 작은 가루로 된 토너에 양의 전기를 띠게 하여 원통에 뿌리면 음의 전기를 띠고 있는 곳에만 토너가 달라붙게 되는 것이다. 이어서 프린트 할 종이는 음의 전기를 띠도록 준비한 후 원통에 눌려서 지나가게 하면, 이때 양의 전기를 띤 토너가 종이에 붙어 글씨가 찍히게 되는 것이다.

■진입장벽 높은 시장에서 추격 성공

국내 프린터 역사는 1980년 중반 삼보, 삼성, LG, 큐닉스 등이 HP, 엡손, 캐논 제품을 OEM(주문자 상표 부착방식)으로 수입, 판매하면서 시작됐다. 도트 프린터를 거쳐 잉크젯 프린터가 활개를 칠 때까지도 국내 기업들은 원천기술 하나 없이 수입에만 의존했다. 자체 프린터 개발에 가장 먼저 뛰어든 곳은 1983년 삼성전자였다. 그러나 프린터 산업의 특성상 개발 및 생산에 투입되는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10년 동안은 만성 적자에 시달렸다.

삼성전자는 그러나 프린터 사업을 포기하기보다 투자를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종합 기술을 필요로 하는 프린터를 위한 제반 기술을 상당수 확보하고 있어 궤도에 오르면 빠른 시너지 효과 창출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프린터 시장은 규모는 크지만 진입장벽이 높아 경쟁업체 수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프린터의 진입장벽이 높은 이유는 다른 디지털기기와 달리 광학, 기계, 화학 등 다분히 아날로그적인 기술도 함께 구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기술이 요구되니 기존 업체들의 특허장벽도 워낙 높다. 레이저 프린터의 경우 자체 엔진 기술을 확보한 업체가 삼성, 캐논, 후지제록스, 브라더, 렉스마크 등에 불과하고 잉크젯 역시 HP, 캐논, 렉스마크, 엡손, 브라더 등에 국한된다.

삼성전자는 2000년부터 프린터 사업을 강화하면서, R&D에 글로벌 업체의 매출 3~4%보다 훨씬 많은 매출의 8~10%를 쏟아 부었다. 프린팅사업부의 R&D 인력이 전체의 60%에 달할 만큼 독자기술 확보에 매진했다. 특히 철저한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프린터 시장의 절대강자인 HP가 장악한 잉크젯 시장을 피하고, 레이저 프린터 부문에 집중해 2003년 독자기술로 레이저 프린터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독자기술을 개발함에 따라 로열티 부담 없이 이후 제품개발에 탄력이 붙게 됐다. 화학, 전자, 반도체 등 기술이 집약된 프린터의 특성상 그룹 차원의 시너지도 이점으로 작용했다.

이후 초고속성장을 거듭했다. 시장조사기관 IDC에 따르면 올 상반기 전 세계 모노레이저프린터(이하 A4기준) 점유율은 HP 55.9%, 삼성전자 10.0%, 브라더 7.0% 순이고 모노레이저복합기는 삼성과 HP가 23.2%로 공동 선두를 달리고 있다. 캐논이 15.3%로 뒤를 이었다.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컬러레이저프린터는 HP 51.2%, 삼성 16.2%, 제록스 5.9% 순이고, 컬러레이저복합기는 HP 44.3%, 삼성 14.6%, 브라더 9.2% 순이다. HP의 독주체제 속에 삼성전자가 전 분야에서 2위권으로 도약한 형국이다.

삼성전자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레이저 프린터 설계기술을 보유하고, 특히 레이저 프린터의 엔진 생산으로는 캐논에 이어 세계 2위에 올라 기술력도 상당한 수준임을 증명했다. 10ppm(page per minute)부터 45ppm 이상 고속 레이저 엔진을 확보한 몇 안 되는 업체 중 하나다. 다양한 기능을 하나의 칩에서 구연할 수 있는 SOC(시스템 온 칩)기술로 세계 최소형 개인용 레이저 프린터 시대를 열었고, 사용자의 니즈와 편의를 고려한 ‘노 노이즈(NO-NOISTM)’ 라는 독자적인 엔진 설계 기술을 개발했다.

기존에는 여러 개의 토너 카트리지를 원통(OPC) 드럼에 장착해 소음이 심했지만, 삼성은 4개 토너 카트리지를 OPC 드럼과 독립적으로 장착, 소음을 최소화하는 데도 성공했다. 삼성의 컬러 레이저 제품은 소음 수치를 48데시벨(㏈)로 낮춰 사무공간에서 사용해도 업무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프린터 시장은 기술도 기술이지만 디자인 경쟁도 치열하다. 삼성프린터가 고속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경쟁사들이 프린터의 기능과 가격 경쟁에만 골몰할 때 혁신적인 기술력으로 디자인 차별화에 승부수를 띄운 것도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지난 9월 선보인 개인용 프린터 ‘스완’과 ‘로건’은 전 세계 내로라하는 디자인 어워드를 석권했다. 프린터의 딱딱한 이미지를 세련된 디자인을 통해 진화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물론 1위 업체 HP도 가만 있지 않는다. 14억달러를 투자해 개발한 확장형 프린팅 기술(SPT)을 활용한 ‘에지라인’은 잉크젯과 레이저의 장점을 결합한 신기술이다. 프린터 헤드가 움직이는 기존 문서출력과 달리 종이가 움직이는 방식으로, 문서 출력 속도를 향상시키고 장당 출력비용과 출력 품질도 우수하게 해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HP에 레이저프린터를 OEM 방식으로 공급하는 프린터업계의 ‘숨은 강자’ 캐논도 프린터를 처음 켰을 때 대기시간을 줄여, 첫 장 출력시간(FPOT)을 단축시키는 ‘순간정착기술’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다.

■130조원, 반도체·디지털TV보다 큰 시장

현재 전 세계 프린터 시장은 130조원 규모로 40조원 규모의 메모리 반도체 시장, 100조원 규모의 디지털 TV 시장보다 훨씬 크다. 유럽과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으며, 관련 소모품 시장과 기업 대상의 토털 프린팅 솔루션 시장도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프린터 시장은 컬러레이저를 중심으로 올해 1350억달러에서 내년 1410억달러, 2009년 1460억달러, 2010년 1500억달러 등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 디지털프린팅 사업부 이장재 전무는 “앞으로 디지털 컨버전스(융합)가 가속화되면 휴대폰을 비롯해 디지털 TV, LCD 디스플레이 등 다방면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회사가 더욱 유리할 것”이라며, “저가(低價) 제품군에서 이룬 성공을 고가(高價) 제품군으로 확장하는 데 성공한다면 세계 프린터 시장 리더로 도약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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