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 거장 윤형근 화백(1928~2007)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같은 메모를 남겼다. 생전 선비 같은 올곧은 자세로 유명했던 윤 화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남색과 흙의 빛깔인 다색의 혼합 물감만으로 작업을 한 작품 역시 군더더기 없는 단순함으로 그의 성품을 드러낸다.
윤 화백은 말이 많이 없어 ‘침묵의 화가’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사후까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세계적인 단색화 인기에 작품을 없어서 못 구할 정도다. 여기에 방탄소년단 리더 RM이 좋아하는 작가로 알려지면서 젊은층 팬까지 거느리게 됐다. RM은 지난 2019년 장기휴가 기간에 이탈리아 베네치아 포르투니 미술관에서 열린 윤형근 회고전에 다녀왔고, 같은 해 호암미술관 윤형근 작품 앞에서 찍은 사진을 올렸다. 지난해 뉴욕 데이비드 즈위너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에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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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지난달 개막 후 일평균 관람객이 300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20~30대 젊은 관람객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갤러리 관계자는 “코로나19 와중에도 관람객들이 많이 찾아와서 놀랐다”며 “RM 덕에 작가가 젊은층에 알려지기도 했고, 워낙 단색화의 거장인 만큼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싶은 컬렉터들이 호기심에 많이 찾아오는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번 전시와 단행본에서는 윤 화백이 하루에 있었던 일, 생각, 느낌 등 그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놔 인간 윤형근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작가가 ‘천지문(天地門)’이라 칭한 작업 개념부터 창작 과정에서의 고뇌, 예술에 대한 생각 등에서 삶과 예술을 일치시키고자 한 인생철학이 드러난다. 장인이었던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 김환기와 이우환, 김창열, 박서보 등 한국 화단의 유명 인사들과 교류하던 삶을 엿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여러 차례 죽음 고비를 넘겼던 그의 삶도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으로 참혹한 시대에 청년기를 보낸 윤형근은 전쟁 중 서울에서 부역했다는 명목으로 1956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고, 숙명여고 미술교사였던 1973년에는 중앙정보부장이 관련된 부정입학 비리를 따졌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초기의 화사한 색채의 드로잉부터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굵고 검은 기둥을 그리기까지 과정도 볼 수 있다. 김환기의 영향을 받아 초기에 다양한 색채를 썼던 윤 화백의 그림은 점차 어두워진다. “언제부터인가 빛깔이 싫어져서 빛깔을 지워 버렸다. 그림이 반드시 색이 많다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지 않나” 등의 기록을 통해 그의 심경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관계자는 “이번 전시는 작품으로는 구체적으로 알기 힘들었던 작가의 삶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