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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복'에는 '의리'로…中작가 한국전시는 취소 없다

오현주 기자I 2017.03.13 00:15:01

중국 '사드' 보복 조치 확산 속
한국기획 중국작가전 예정대로
백남준 후예 '상상적 아시아' 전
쑹둥 등 17팀 '역사'로 영상작업
사진작가 지저우 개인전 '모' 전
中 대표 추상미술 7인 '극' 전도

중국 사진작가 지저우의 ‘모형 6’(2017). 크고 작은 책을 첩첩이 쌓아 거대한 도시모형을 만들어 무미건조하고 획일화한 현대도시를 꼬집는다(사진=갤러리수).


[이데일리 오현주 선임기자] “사드는 정치적인 사안일 뿐이다. 예술이 정치에 좌우돼선 안 된다.” 중국 유명 미디어아트작가인 쑹둥(51)의 표정에선 동요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배짱 같은 여유까지 보였다. “한국전시를 위해 이 자리까지 오는데 불이익이나 어려움은 없었다. 백남준아트센터가 사드 배치를 결정한 건 아니지 않으냐.”

지난 8일 경기 용인시 기흥구 백남준아트센터가 연 기획전 ‘상상적 아시아’의 오프닝에 앞선 간담회. 이 자리에서 쑹둥은 마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가 도대체 뭐냐는 식으로 담담하게 생각을 밝혔다. “세계 모든 사람은 평화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결정이 있을 때마다 균형이 삐끗하긴 하지만 결국 균형을 유지하고 나누려는 지혜가 필요하다.”

사드 배치 결정에 대한 중국의 보복성 조치가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퍼지고 있는 상황. 그런 중에 한국이 기획한 중국작가전은 어떤 취소나 연기 없이 예정대로 열리고 있어 묘한 대조를 이룬다. ‘보복’에는 ‘의리’. 이른바 ‘보란 듯이 중국전’인 셈이다.

오는 7월 2일까지 4개월여의 대장정에 나선 백남준아트센터의 ‘상상적 아시아’ 전은 17명(팀)의 세계 유명 미디어아티스트 중 쑹둥을 비롯해 쉬빙·양푸둥 등 중국작가 3명을 포함했다. 국적 순으론 가장 많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갤러리수는 중국 사진작가 지저우의 개인전 ‘모’(模)를 오는 28일까지 이어간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고민하는 시각’을 대형 월페이퍼 등 10여점에 세세히 반영했다. 서울 성수동 더페이지갤러리는 ‘극’이란 테마로 중국 추상미술계를 대표하는 작가 7인의 그룹전을 오는 5월 14일까지 연다. 중국 현대미술을 선도하는 이들이 수행의 붓터치로 시도한 미니멀기법의 작품 40여점을 걸었다.

▲백남준 후예들의 ‘백남준 넘어서기’

백남준아트센터가 올해 첫 기획전으로 꺼낸 ‘상상적 아시아’ 전의 열쇠말은 ‘역사’다. 승자의 기록이라는 ‘히스토리’와는 차이가 있다. 작가들이 주관적인 관점에서 기록한 다양한 ‘히스토리스’기 때문. 아시아를 배경으로 20분 남짓한 무빙이미지 23편으로 구성한 전시는 ‘아시아 자체의 지역성을 들여다보는 그룹’과 ‘아시아를 바라보는 통합된 다양성을 찾는 그룹’의 시선을 섞었다.

일본작가인 아이다 모코토는 ‘자칭 일본 총리라고 주장하는 남성이 국제회의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담은 비디오’(2014)를 선뵌다. 26여분간 한 남자는 바벨탑의 전설을 멈춘 그때의 ‘에도시대’로 돌아가 폐쇄적 외교정책을 펼치자고 주장한다. 일본 억양으로 더듬더듬 영어를 말하는 주인공은 영락없이 아베 신조 총리처럼 보인다. 비장한 표정과 어눌한 연설이 빚은 우스꽝스러운 모양. 작가는 바로 이것이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정치적 권력이라고 폭로한다.

일본 미디어아티스트 아이다 마코토의 ‘자칭 일본의 총리라고 주장하는 남성이 국제회의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담은 비디오’(2014).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연상케 하는 남자가 등장해 26분 간 더듬는 영어로 ‘에도시대’로 돌아가 폐쇄적 외교정책을 펼치자고 주장한다(사진=백남준아트센터).


쑹둥은 ‘시작 끝’(2017)이란 영상작품을 내놨다. 두 개의 스크린을 마주 배치하고 한 면에는 영화제작사 로고를 잉크 위에 반사한 이미지를, 다른 한 면에는 영화의 마지막 화면을 비춘다. 작가는 “디지털기기의 덕분에 영상은 개인적인 기억이 됐다”며 “그 위에 집단의 기억을 얹어 관람객이 체험자이자 제작자란 걸 알리려 했다”고 설명했다.

이들 외에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경력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태국)을 비롯해 와엘 샤키(이집트), 아흐마드 호세인(레바논), AES+F(러시아), 하룬 파로키(독일), 호 추 니엔(싱가포르), 문경원&전준호(한국) 등.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의 후예들이 백남준의 공간에서 펼친 전시는 오래전 백남준이 굳이 선을 그은 비디오아트의 영역을 과감히 넘어섰다는 의의가 있다.

중국 미디어아티스트 쑹둥의 ‘시작 끝’(2017). 영화제작사에서 수집한 로고를 잉크 위에 비춰 만든 움직이는 반사체를 통해 ‘진실한 가상’에 대해 묻는다(사진=백남준아트센터).


서진석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사진·영상이 더 이상 현실기록이 아니고, 사실·허구의 경계도 사라져 무빙이미지는 유기적인 가능성을 가진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전시의 모든 작가에게서 백남준은 살아 있다”며 “비록 정치판에는 자국 이기주의가 강하더라도 예술은 공공성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혼돈의 세상질서에 대한 비판이자 성찰”

지저우의 ‘지도 5’(2014)(사진=갤러리수).
첩첩이 쌓은 책으로 세운 거대한 도시. 지식과 교양의 상징이 축적한 이상적인 세상인가. 아니다. 정반대다. 무미건조하고 획일화한 세상일 뿐이다. 갤러리수가 중국서 불러낸 지저우(47)는 실재와 허구, 충돌과 모순 등을 주제로 삼는 사진작가다. 이번 전시에선 ‘책으로 쌓은 도시’와 ‘지도를 구겨 만든 산’ 연작을 대거 옮겨왔다. 일일이 상황을 연출하고 카메라를 들이대 얻은 거대하고 디테일한 풍경이다. 정치·역사·철학서는 물론 초등생 교과서까지 섬세하게 얹은 빌딩숲 모형은 200호를 훌쩍 넘기고, 구겨놓은 지도에 물감을 채워 또 다른 산맥과 바다를 연출한 지도모형에는 작은 지명까지 생생하다.

지저우는 “자연·인간관계가 황량해지고 세상질서가 혼돈에 빠지는 데에 대한 비판이자 성찰”이라며 “요즘은 모방이 되레 실재를 대체한다. 그렇다고 작품 속 풍경이 결코 이상향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정치·외교관계 뛰어넘을 “예술은 수행”

1950년대생 마슈칭부터 1960년대생 샤오이눙, 1980년대생 츠췬까지. 7명의 중국 추상미술가를 불러 기획한 더페이지갤러리의 ‘극’ 전은 중국 미술계의 위상과 고민을 동시에 드러낸다. 실제 무엇을 표현했다기보다 세상 모든 본질에서 더듬어 종국에 ‘극’에 도달하는 이념·잠재의식 등을 다채로운 붓질로 탐구한 것이다.

중국 추상미술가 마슈칭의 ‘무제 3’(2014). 오늘날 회화에는 너무 많은 부가적인 요소가 붙었다며 그저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는 회화의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이른다(사진=더페이지갤러리).


특히 중국 추상미술이 서양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점을 내보이려 한 의도가 배어 있다. 노자·장자 등이 영향을 미쳤다는 거다. 칸딘스키나 몬드리안 등이 주도한 서양 추상미술과는 맥락 자체가 다르다는 얘기다. 십자형 패턴을 정교하게 구성한 딩이, 두꺼운 물감을 올려 그린다기보다 정리한다는 개념으로 회화 본연의 모습을 이끌어낸 마슈칭, 바람과 비, 햇볕 등을 특유의 음률과 리듬으로 풀어낸 천단양 등. 전시는 사물과 자신을 찾는 크고 작은 사이즈의 ‘수행’을 한자리에 들였다.

전시를 기획한 펑펑 북경대 교수는 “극에 대한 추구는 어느 작가도 다르지 않다”며 “예술로써 한·중 간의 정치외교적 상황을 뛰어넘을 것”을 강조했다. “비록 규모는 작은 전시지만 양국 간 문화교류가 얼어붙은 분위기를 녹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소회를 덧붙였다.

천단양 ‘바흐: 똑같은 기질 125’(사진=더페이지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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