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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우 흥행작 '지킬앤하이드', 미국에선 조기폐막한 작품?[홍정민의 뮤지컬 톺아보기]

장병호 기자I 2023.08.05 08:30:00

뮤지컬 성패를 가르는 현지화
국내서 성공한 ''스위니토드'' ''애비뉴Q''
가사·대사 번역, 한국 관객 공감 이끌어
번역에 대한 관심, 지금보다 높아져야

한국 뮤지컬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데에는 라이선스 작품(해외 원작을 현지화한 작품)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해외에서 유명한 작품이라고 해서 한국에서도 무조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관객의 기대와 수요에 맞게 적절히 현지화해야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다. 뮤지컬 번역 전문가인 홍정민 동국대 영어영문학부 교수가 국내에서 크게 흥행한 해외 라이선스 작품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이들 작품이 어떻게 현지화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다양한 각도에서 소개한다. <편집자 주>

배우 조승우가 출연했던 뮤지컬 ‘지킬앤하이드’ 2018년 공연 장면. (사진=오디컴퍼니)
[홍정민 동국대 영어영문학부 교수] 뮤지컬 ‘지킬앤하이드’를 보지 않았어도 아름다운 선율의 명곡 ‘지금 이 순간’을 흥얼거릴 수 있는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은 올해까지 여덟 차례 공연되는 등 한국 뮤지컬 업계를 상징하는 흥행작으로 자리 잡았다. 배우 조승우의 뮤지컬 대표작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국 브로드웨이 원작이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심지어 재연은 관객이 적어 조기 폐막했다. ‘지금 이 순간’의 유명한 가사 ‘당신이 나를 버리고 저주하여도’의 원곡 가사를 아는 사람도 드물다. ‘This day or never I’ll sit forever with the gods’(지금이 아니면 신과 영원히 함께 설 수 없다)로 한국어 가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왜 미국 본토에서는 흥행하지 못했던 작품이 한국에서는 돌풍을 일으켰을까. 바로 현지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외국 뮤지컬을 들여와 한국 무대에 올리는 라이선스 제작 과정에서는 작품을 한국 관객의 기대와 수요에 맞게 바꾸는 현지화는 필수적이다. 연출, 음악, 연기, 소품, 안무 등 다양한 분야의 현지화가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작업이 바로 가사와 대사의 번역이다. 한국어로 번역된 가사와 대사가 한국 관객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면 원작이 아무리 훌륭해도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처럼 번역은 원작과 다른 부분을 부각시킴으로써 전혀 다른 작품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이를 통해 작품에 대한 관객의 수용, 나아가 흥행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지킬앤하이드’의 한국 흥행에는 인물의 인간적인 면모, 애잔함 등과 사건의 극적인 측면을 강화한 것이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그 변화가 바로 번역된 가사와 대사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앞서 소개한 가사에서 볼 수 있듯 ‘신의 영역으로 넘보는 야심만만하고 건장한 체구의 지킬’과 ‘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희생을 감내하는 섬세한 외모의 지킬’이 주는 이미지의 차이는 극명하다. 또, 이러한 캐릭터가 ‘하이드’라는 정반대의 인물로 변할 때 발생하는 극적 효과 역시 원작과 상당히 다른 부분이다.

뮤지컬 ‘스위니토드’ 2022년 공연 장면. 스위니토드 역의 배우 강필석(왼쪽), 러빗 부인 역의 배우 전미도 공연 장면. (사진=오디컴퍼니)
‘브로드웨이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미국 뮤지컬 거장 스티븐 손드하임이 작사 작곡한 ‘스위니토드’도 마찬가지다.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아재 개그’와 같은 언어 유희나 ‘B급 유머’가 집중적으로 부각됐다. 이로 인해 ‘스위니토드’는 “손드하임의 작품은 난해하다”는 통념을 깨고 한국에서만 네 차례 공연되는 등 상당한 흥행 성적을 거뒀다.

인형을 통해 양극화, 청년실업, 성소수자 등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풍자하는 ‘애비뉴Q’는 어떨까. 이 작품의 한국어 자막은 다양한 글씨 폰트와 색깔은 물론 이모티콘과 그림까지 사용해 보는 재미를 선사했다. 이 작품을 한국에서 연기한 외국 배우들은 원작의 유머가 통하지 않을 것 같으면 한국어 자막을 가리키며 웃으라고 할 정도였다.

아쉬운 점은 이렇듯 한국 뮤지컬 산업에서 차지하는 번역의 중요성이 큰 데도 아직 업계 전반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프로그램 북이나 홍보자료에는 ‘번역’보다 ‘번안’, ‘우리말 가사·대사’라는 명칭이 더 자주 등장한다. 한국 뮤지컬 시상식에서도 ‘번역’ 부문은 ‘각색’, ‘번안’ 등으로 묶여 시상된다. 이들 시상식에서 번역가가 번역 작업으로 수상한 횟수는 단 한 차례에 불과하다.

한국 공연예술 시장에서 뮤지컬의 평균 관객수 및 유료 관객 비중은 70%에 육박하고 한국 뮤지컬 산업에서 라이선스 작품의 시장 점유율이 60~70%에 달한다는 점, 한국 창작 뮤지컬이 가요, 드라마 등에 이어 한류를 이끌 새로운 콘텐츠로 각광받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라이선스 작품의 수입과 수출 모두에 필수적으로 관여하는 번역이 지금 받고 있는 관심과 인정은 과연 정당한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필자 소개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동국대 영어영문학부 영어통번역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뮤지컬 번역으로, ‘Taboos, Translation, and Intersemiotic Interaction in South Korea‘s Successful Musical Theaters’, ‘국내외 뮤지컬 번역 연구 현황 및 향후 연구 방향’, ‘패밀리 뮤지컬 번역과 아동 관객: ‘마틸다’를 중심으로’, ‘뮤지컬 번역에서 상호텍스트성에 대한 멀티모달적 고찰: ‘썸씽로튼’을 중심으로’ 등 라이선스 뮤지컬 번역 현상을 다각도로 분석한 논문을 A&HCI급 국제 학술지, KCI 등재지 등 국내외 저명 학술지에 활발하게 출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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