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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금의 소리를 흔히 ‘대바람 소리’라고 한다. 대금의 재료인 대나무(竹)에 입김을 불어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이영섭만의 대바람 소리는, 텅 비어있는 대나무의 곧은 몸속, 그 내면의 공간을 본인이 동경하는 자유와 사랑, 번민과 고뇌, 그리고 침묵의 울림으로 채우고 비우는 과정을 연상케 했다. 특히 첫 곡 ‘호접지몽(胡蝶之夢)’이 그러했다.
어느 날 장자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자신이 나비가 되어 꽃밭을 날아다니는 꿈을 꾸게 된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 ‘나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장자라는 인간이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고 이로부터 꿈과 현실을 구분 짓는 것 자체가 의미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한다. 즉 호접지몽은 사물과 내가 한몸이 되는 경지를 의미하는데, 이영섭과 대금도 마치 물아일체(物我一體)와 같았다. 연주회 내내 그의 음악은 대금과 하나였다.
이번에 개작 초연된 곡들은 모두 창작자 본인의 다양한 경험과 취향, 경력과 철학 등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담겨 고유의 색깔과 울림으로 전달되었다. 이영섭만의 응축된 톤과 색채는 변청과 변조가 다채롭게 표현되어 그간 켜켜이 쌓인 삶의 궤적들처럼 밀도 있는 곡을 연주했다. 명확한 멜로디 흐름이나 다른 파트와의 상호관계, 비브라토(농현·농음) 없이 호흡으로 채워지는 무음의 순간까지도 연주자의 역량과 유연성 그리고 즉흥적인 교감이 잘 드러난 연주였다. 이번 무대는 연주자인 동시에 작곡자로서의 이영섭이 앞으로 보여줄 더 폭넓은 활동을 기대하는 자리였다.
이영섭은 민속악을 중심으로 시나위와 산조가 갖는 문화적 유산으로서의 가치와 예술에 대한 주체적인 탐구와 체득을 통해 ‘이영섭가락 대금산조’를 만들어 ‘몰입의 즐거움Ⅰ,Ⅱ,Ⅲ,Ⅳ’ 등을 꾸준히 발표해왔다. 2014년 제6회 대금독주회 ‘몰입의 즐거움Ⅰ’에서 본인의 산조 ‘이영섭가락 대금산조’를 선보여 그해 ‘KBS국악대상 연주관악상’을 수상하였다. 그 이후 정악이 지닌 내재적 초월의 깊은 예술성을 탐구하고 옛 명인들을 반추하며 1930~1950년대의 음악 유산들을 연구했다.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시간의 주름’이란 타이틀로 시간을 초월한 음악의 본질을 담아 발표했고, 지속적인 연구를 이어가며 ‘이영섭의 정악-시간의 주름’ 음반을 2022년 12월 발매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