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유태환 기자] 2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게 참패한 미래통합당이 결국 김종인 전(前)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하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당내에서 비대위의 권한과 기간을 놓고 공개적으로 이견이 표출되는 등 자중지란(自中之亂)은 계속되고 있는 양상입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전국단위 선거에서 패배한 지도부가 사퇴하고 당이 비대위 체제로 전환되는 일은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하지만 제왕적 총재 스타일의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정치권에서 물러난 뒤 수많은 비대위가 있었지만 성공 사례는 손에 꼽습니다.
비대위 자체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통합당 일부 인사들의 근거도 이런 점에 기인합니다. 실제로 다수의 비대위는 차기 전당대회를 위한 징검다리 용에 지나지 않았다는 지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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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비대위 중 대표적인 성공 모델로는 2012년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와 2016년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대위가 꼽힙니다. 해당 비대위들은 자신들이 이끈 총선에서 당에 승리를 안겼고 이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다만 ‘좋은 예’로 언급되는 두 비대위 체제도 출발부터 마무리까지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2011년 당시 한나라당은 하반기 재보궐 선거 참패로 홍준표 최고위 체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당내 최대 계파인 친박(박근혜)계 수장 박근혜 의원이 비대위원장 물망에 오르자 친이(이명박)계와 소장파들은 강력 반발했습니다. 2016년 민주당에서도 새누리당 비대위원 출신인 김종인 전 위원장을 비대위원장으로 영입하는 데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양측 모두 각각 박근혜·문재인이라는 당내 최대주주의 힘을 통해 해당 비대위 체제를 관철했고 공천권을 기반으로 과감한 당 체질 개선 드라이브에 시동을 걸 수 있었습니다. 당 안팎에서 전망이 어두웠던 총선도 이런 개혁을 바탕으로 승리했습니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는 ‘이명박 정권 심판’ 목소리 속에 패색이 짙다는 예상을 깨고 2012년 총선에서 과반인 152석을 얻었습니다. 여세를 몰아 새누리당은 같은해 12월 대선까지 승리했습니다.
김종인 민주당 비대위 역시 국민의당 분당 사태 등으로 100석도 어렵다는 일각의 예측을 깨고 123석을 얻어 원내 1당이 됐습니다.
◇당내 반발로 쇄신 물 건너간 단기체제도
반면 실패한 비대위의 대표사례로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직후 구성된 인명진 자유한국당(통합당의 전신) 비대위가 언급됩니다. 인명진 목사는 박 전 대통령 탄핵 뒤 당을 쇄신할 외부인재로 영입됐지만 공고한 친박의 벽을 넘지 못하고 약 3개월 만에 물러났습니다.
친박계 좌장(座長)이었던 서청원 의원은 의원총회에서 “할복하라고 인명진 위원장이 말씀하셨는데 제가 할복하지 않았다. 목사님 제가 언제쯤 할복하면 좋겠느냐”며 “목사님이 당을 떠나야 한다”고 공개 항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비대위의 최대 과제가 사실상 바른정당을 향해 탈당하는 의원들을 최소화하는 것으로 전락하면서 혁신은 물 건너가게 됩니다.
외부 수혈로 파격적인 비대위를 구성하려고 했지만 인재영입이 무산돼 이를 추진한 지도부가 사퇴한 사례도 있습니다. 2014년 7.30 재보궐 패배로 김한길·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민주당의 전신) 공동대표가 물러난 뒤 취임한 박영선 비대위원장은 안경환·이상돈 보혁(保革) 융합 비대위 체제를 추진했다가 당내 반발 등으로 실패하자 비대위원장직을 내려놔야만 했습니다.
외부 인사 영입에 대한 당내 반발이 예상외로 강하자 박 위원장의 탈당설까지 흘러나오는 등 지도체제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난관을 겪었습니다. 결국 박 위원장이 사퇴하고 문희상 비대위원장 카드라는 내부 수혈로 논란이 마무리됐습니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2012년 대선 패배에 이어 또 비대위원장이라는 구원투수 역할을 하면서 ‘직업이 비대위원장’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與 “대타 용도로 쓰이는 건 싫어하는 분”
통합당은 지난해 2.27 전당대회를 통해 김병준 비대위 체제를 마무리한 지 약 1년 2개월 만인 오는 28일 김종인 전 위원장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의결하기 위한 전국위원회를 개최합니다. 다만 난파된 통합당호(號)를 구할 수 있을지 전망이 밝지는 않습니다.
비대위에 전적으로 힘을 실어줄 만한 계파 수장이 없는 것은 단점이기도 하지만 비대위를 견제할 만한 특정 계파의 세 결집이 어려운 점은 반대로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앞선 성공사례인 비대위와 달리 당을 휘어잡을 수 있는 공천권이 없다는 점에서 과연 김종인 비대위의 ‘영(令)’이 제대로 설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직전 김병준 비대위 역시 당협위원장을 물갈이하는 등 여러 가지 혁신을 시도했지만 총선이 1년 이상 남은 시점에서 진행된 ‘칼질’로 당을 휘어잡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김병준 비대위 체제 추진 과정에서 당시 김성태 당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에게 사퇴를 요구했던 심재철 당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가 현재 “당선자 중심으로 논의를 해야 한다”는 비판을 받는 것 역시 정치적인 역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민주당 내부에서도 “김종인 전 위원장이 일은 합리적으로 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은 통합당이 희망을 가져볼 만한 대목입니다.
민주당 관계자는 통화에서 “김종인 비대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며 “문재인 대표님이 요청을 해서 왔었고 실무적으로 일하는 데도 어려움이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합리적으로 일했던 기억이 난다”면서도 “본인에게 권한을 줘야지 대타나 이런 용도로 쓰이는 건 싫어하는 분”이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