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방관이다]일하다 다쳤는지 아닌지, 심의에 걸리는 시간 '3.8분'

한정선 기자I 2015.11.09 06:00:00

지난해 요양승인 신청 총 5404건..1633건이 심의대상 올라
연금급여심의회 매주 1회 2시간 동안 평균 31.4건 처리
심의위원 "서류 미비하고 시간 쫓겨 정확한 심사 불가능"

[이데일리 한정선 기자]“30대인 제 허리디스크가 나이를 먹어서 생긴 병이라고 공무상 상해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현직 소방관 A씨)

소방서에서 화재진압요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A씨는 작년 12월 공무원연금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A씨는 지난해 화재현장에서 소방호수 연장을 위해 70kg짜리 샌드위치 패널을 들어 올리다가 ‘뚝’하는 소리와 함께 허리에서 심한 통증을 느끼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A씨는 척추증, 디스크파열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현장 복귀 후에도 통증이 계속 재발해 재수술과 통원치료를 했다.

그러나 공무원연금공단은 A씨의 척추질환이 공무상 발생한 질병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공무수행이 직접적인 원인이 아닌 나이를 먹어가면서 생긴 질환이라는 것이다. A씨는 “공무상 질환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앞으로도 계속 병원비를 자비로 내야 한다”며 “소송비용이 만만찮고 바쁜 일과에 시간을 쪼개야 해 답답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적지 않은 소방관들이 화재를 진압하고, 사람을 구조하다 다치고 질병을 얻는다. 사건 현장에서 화상을 입는 등 눈에 보이는 부상은 공무상 상해 판정을 받기가 쉽다. 그러나 무거운 물건과 사람을 옮기다 허리를 다치거나 사이렌 소리에 난청이 오는 등 간접적인 부상은 공무상 상해로 판정이 내려지는 경우가 드물다.

공무원이 업무중 다치거나 사망했을 때 보상 책임을 지고 있는 공무원연금공단은 이같은 경우 기계적으로 불승인 판정을 내린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소방관 뿐 아니라 100만 공무원들이 직무를 수행하다 죽거나 다칠 경우 치료비와 요양비 및 보상금 등의 지급을 결정하는 곳이 공무원연금공단내 공무원연금급여심의회(심의회)다.

총 9명의 심의위원이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상록회관에 모여 공무상 상해에 따른 요양승인(공상) 신청 내용들을 살펴보고 승인 여부를 논의한다. 심의회는 변호사, 근로복지공단 직원, 인사혁신처 연금복지과 공무원, 직업환경의와 정신과 정형외과 등 각분야 의료인들로 구성된다. 현재 심의회에는 의료인 26명과 변호사 4명, 공무원 4명, 위원장(윤석호 공무원연금공단 연금본부장) 등 총 35명이 심의위원으로 위촉돼 있다. 이들 중 9명이 한 팀이 돼 번갈아가며 매주 회의를 연다.

그러나 문제는 심의회에 올라오는 공상 신청자료가 부실해 심의 또한 부실하게 이뤄지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점이다. 아울러 많은 심사를 단시간내에 처리하다보니 면밀한 검토 없이 기계적으로 승인·불승인 여부를 결정할 수 밖에 없다. 심의회 위원인 C씨는 “심의를 철저히 하려고 해도 해당 질환의 업무연관성 여부를 판단할 자료가 부족해 충분한 검토가 어렵다”고 털어놨다.

가령 허리디스크의 업무연관성 여부를 판단하려면 운반하는 중량물의 무게와 하루 운반 횟수, 운반거리, 운반할 때의 자세, 작업대의 높이와 허리의 자세(굽히거나 비튼 정도), 지속시간이나 반복의 빈도, 하루 근무시간 등을 자세히 조사해야 하지만 심의회에 제출하는 자료에는 ‘이러이러한 업무’라고 몇 줄만 적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전체 유족보상과 장해연금 지급 등 요양승인 신청은 총 5404건이다. 이중 사안이 명확해 전자결재가 이뤄진 3771건을 제외한 1633건이 심의회에 올랐다. 매주 심의회가 열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 심의회에서 처리하는 안건은 평균 31.4건이다. 심의회는 보통 2시간 정도 열린다. 누군가에겐 인생이 달린 요양승인 심사가 3.8분당 한건 꼴로 처리된다는 얘기다.

C위원은 “짧은 시간동안 많은 안건을 처리하다보니 각 신청건의 개략적인 개요를 설명한 뒤 심의회에 참석한 관련 분야 의사가 승인여부에 대해 의견을 밝히면 통과 여부가 결정되는 식”이라며 “간혹 의원들간에 의견이 엇갈릴때만 토론이 진행된다”고 전했다.

연금공단은 2013년 12월부터 요양승인 신청을 한 공무원이 심의회 참관을 요구할 경우 필요성 여부를 판단해 참관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참관 신청을 하는 공무원은 극히 드물다. 요양승인신청을 한 경험이 있는 한 공무원은 “심의회를 참관해도 어차피 의견진술을 못하는 만큼 별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요양승인 신청절차도 문제가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부상을 당한 공무원이 진단서, 처방확인서, 소견서 등을 첨부해 요양승인을 신청하면 기관의 연금 담당자가 사건을 조사해 경위서를 작성한다.

요양승인 신청 시 첨부해야 하는 서류가 10여종에 달해 부상당한 공무원이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병원을 돌아다녀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울러 담당자들이 대부분 일반 행정직 직원이어서 전문성이 떨어져 부상 발생 사유 등에 대한 정확한 서술이 이뤄지지 못해 심의과정에서 불이익을 겪는 경우가 빈번한 것도 문제다.

공무원연금공단 관계자는 “의료법을 개정해 연금공단이 직접 병원에 관련 서류를 요청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며 “각 기관 연금 담당자가 업무 처리시 활용할 수 있는 지침서를 발간해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 29일 대전의 한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소방관들이 화재 진압에 나섰다.(사진=국민안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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