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랑하고 낭만적인 음악과는 다른, 그런 음악들은 소일거리로 여기게 할 만큼 냉혹한 현실을 응시하는 ‘저항’의 모던 포크였다. 음악계 전체로 볼 때는 일각의 친화집단에서나 꿈틀대는 연약한 실체였는지 몰라도 당대의 청년 특히 대학생들에게는 장막에 가려있던 현실을 드러내는 프로메테우스의 불꽃, 찬란한 빛줄기와도 같았다. 무엇보다 노랫말이 달랐다.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와 같은 대중가요 가사는 사상 최초였다. 젊은이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았다. 그들은 독재의 억압, 특권, 불평등이 지배하는 삶은 어떤 문명화된 기준으로도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없으며,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배운 세대였다. 가만있지 않고 일어나 움직여야 했다. 김민기의 위업은 그때까지 당연하게 여겨진 음악계의 사고 패턴들을 물리고 새롭고 동적(動的)인 가치를 활성화한 것이었다.
엄혹한 군사독재 시대에 이게 무탈하게 넘어갈 수 없었다. 방송사는 ‘아침이슬’을 건전가요로 포상했지만 당국은 금지라는 철퇴를 내렸다. ‘작은 연못’,‘상록수’, ‘늙은 군인의 노래’,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과 같이 제목부터 수상한 곡들은 1975년 긴급조치 9호 발령 이후 일제히 방송과 출판이 불허되었다. 이 노래를 부른 ‘김민기의 페르소나’ 양희은도 정상적 노래활동이 어려웠다.
김민기는 노동자로 공장에 취업하며 도피생활을 했다. 그의 사적인 모든 것이 공적으로 사람들에게 읽혔다. 아마도 그는 예술가의 순수한 자기표현이 모조리 공적·사회적으로 해석되는 게 싫었을 것이다. 저항적 색채가 없는 곡도 김민기가 했으면 전부 운동권가요, 민중가요로 분류됐다. 싱어송라이터의 시작이었으면서도 노래 부르기에 거리를 둔 그였지만 그래도 지속성은 예술에 대한 봉사만이 가능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학전소극장은 가수를 넘어서는 진정한 그의 정체성이었다. 그는 외부의 규칙과 관습, 흥행에의 압박에서 벗어나 오로지 예술의 명령만을 따랐다. 매정하게 변해버리는 시간의 무섭고 까다로운 성질과 싸웠다. 김민기를 보내면서 반사적으로 지금의 예술이 맹목적 충동, 상업적 성취만을 우대하는 광란,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는 사실상의 폭압에 단단히 결박돼 있다는 생각이다.
레너드 번스타인이 말했던가. “내 우주 가운데 내가 가장 안전함을 느끼는 곳, 바로 예술을 난 찾았다”고. 김민기는 예술을 만드는 원천이자 예술적 희열을 만드는 영감 그리고 알코올에 자신을 바쳤다. ‘가자 천리길 굽이굽이쳐 가자/ 흙먼지 모두 마시면서 내 땅에 내가 간다!’ 그가 쓴 곡 ‘천리길’의 가사처럼 그는 사후에도 천리길을 걸을 것이다. 그는 묵묵히 천리길을 걷겠지만 우리에게 그의 죽음은 왠지 모르게 땅이 꺼져가는 느낌으로 온다. 빛과 그림자가 한꺼번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