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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는 과거 일본의 도매상인들 동업조합을 부르는 말이었고, 투자한 지분만큼 얻는 권리를 ‘가부시키’라고 칭했다. ‘가부’는 일종의 경제공동체를 뜻하는 말이다. 여러 지역에서 어릴 적 “가부 맺자”, “가부하자”, “가부 걸자”고 썼던 일본어가 세월이 흘러 ‘깐부’라는 말로 변해서 다시 등장했다는 얘기다. 말소리의 유사성으로 볼 때 설득력이 있다. 비탈을 뜻하는 고바이가 ‘코우바이(勾配·こうばい)’라는 일본말의 찌꺼기인 것처럼 말이다.
한류 절정 드라마에 웬 일본말 찌꺼기냐 싶지만, 우리 살아온 형편이 그렇다. 드라마 제목인 ‘오징어 게임’은 어떤 동네에서는 ‘오징어 가이생’이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싸움을 시작한다’는 뜻의 일본어 ‘가이생’(開戰개전)에서 왔던 말이었다. 놀이마저 일본 것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여러 자료에서 ‘오징어 놀이’를 민속놀이로 소개하고 있어 천만다행이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서는 일제강점기에 ‘가이생’이라고 부르던 습관이 한동안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패’, ‘한편’ 대신 일본어 ‘가부’를, ‘놀이’ 대신 일본어 ‘가이생’을 쓰던 우리 문화가 이제 한류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휩쓸고 있다. 놀랍고 칭송할 만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가부’가 ‘깐부’가 되고 ‘가이생’이 영어 ‘게임’으로 변한 이 뒤섞임이 문화 현상으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그런 말들의 유입과 변화에 담긴 슬픈 역사가 떠올라 그저 마뜩지만은 않다. 그것이 어찌 자유롭고 평등한 문화 교류였겠는가.
한류와 국뽕 때문에 이제 우리는 일본을 넘어섰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일본이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놀랄 때가 많다. 언론과 공공기관, 기업에서 쓰는 영어도 대개 일본에서 쓰는 걸 따라 한다는 사실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전국 지자체에서 그렇게도 무수히 벌이는 각종 ‘챌린지’, 기계에다 사용하던 말을 사람에게 적용한 ‘스펙’, 고위 공직자들도 자주 사용하는 ‘스케일업’, 말로만 수준을 올려버리는 ‘레벨업’ 등 영어의 원래 의미와도 다르게 일본이 자기네 편의대로 만들거나 의미를 붙여 사용하는 일본식 영어가 정말 많다.
국제관계학 박사 소준섭의 분석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일본에서 쓰던 대로 우리가 따라 쓴 영어 단어는 테이크아웃, 스킨십, 에스엔에스, 프로듀서, 베드타운, 패널, 아메리카노, 원룸, 콜라보, 매너모드, 플러스알파, 셀럽, 에코백, 체크포인트, 스킬업, 파워업, 마이너스 성장, 인프라, 해프닝, 헬스센터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이후 미국의 지배가 미친 영향인지 세계화 욕망 탓인지, 메이지 유신 시절 서양의 문물과 개념을 번역하던 그 도전적인 창의력은 어디 가고 오늘날 일본 사람들은 영어 단어 쓰길 좋아한다. 신기하게도 이런 쪼가리 영어를 우리 언론과 공무원들도 그대로 가져다 쓴다. 일본이 쓰는 영어라면 우리 또한 써도 된다는 ‘깐부’라도 맺은 것일까?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는 주장도 일본에서 먼저 일어난 걸 따라 했다. 우리는 많은 면에서 일본을 벗어났지만, 어떤 건 여전히 일본을 따라 한다. 그중에서도 하필이면 영어 남용을 따라 한다니, 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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