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끄덕끄덕]축구 야구 말구

송길호 기자I 2021.08.19 06:10:00
[정덕현 문화평론가] 우리에게 축구는 올림픽 같은 국가 스포츠 이벤트에서 여전히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다. 이번 도쿄올림픽도 다르지 않았다. 뉴질랜드전에 1대0으로 충격적인 패배를 안고 시작했지만 루마니아전에서 4대0, 온두라스와는 무려 6대0으로 대승을 거두며 한껏 기대감을 높였다. 그래서 4강을 두고 벌인 멕시코와의 경기가 있던 7월31일 밤은 축구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했다. 아쉽게도 3대6으로 패배하며 4강 진출의 꿈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지만.

축구만큼 인기 있는 스포츠는 단연 야구였다. 이스라엘과의 1차전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10회 연장까지 가는 경기에서 결국 6대5로 승리하면서 기대감을 높인 한국팀은, 미국에는 4대2로 졌지만,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경기에서 짜릿한 9회말 4대3 역전승을 거두면서 우리를 설레게 했다. 이스라엘과의 2차전에서 11대1로 콜드게임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하는 듯했지만, 이후 일본과 미국 그리고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마저 지면서 메달의 꿈은 좌절됐다. 기대가 컸던 탓인지 무력하게 지는 모습에 불만 섞인 목소리들마저 터져 나왔다.

그런데 축구와 야구가 어떤 기대감을 만들고 거기에 얼마나 상응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는가와는 상관없이, 이러한 이른바 ‘인기 종목’에 집중되는 스포츠중계가 과연 온당한가 하는 비판적 시선들도 등장했다. 특히 야구와 축구 그리고 배구 경기가 동시에 벌어졌던 7월31일 밤 상황은 이러한 비판적 시선을 수면 위로 끌어냈다. 올림픽 중계를 독점적으로 방영한 지상파3사는 시청자들을 배려하지 않고 모두 똑같이 축구와 야구를 교차해 중계함으로써 배구를 소외시켰다. 물론 지상파가 갖고 있는 케이블 채널을 통해 배구 중계를 하긴 했지만, 시청자들은 이러한 선택이 온당하지 않다고 여겼다. 게다가 그 날 모두 상대팀에게 패배한 축구, 야구와 달리 배구는 일본을 3대2로 꺾고 4강에 진출했다. 김연경을 위시한 선수들에 대한 아낌없는 찬사와 박수들이 쏟아졌다. 그러니 관성적으로 축구와 야구를 모두 똑같이 중계한 지상파3사의 선택이 얼마나 구시대적인가가 저절로 드러난 셈이었다.

이 상황을 보며 단박에 필자의 머리에 떠오른 프로그램이 있었다. KBS <축구 야구 말구>다. 축구를 대표하는 이영표와 야구의 투머치토커 박찬호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숨은 재야의 고수들과 배드민턴 같은 생활체육을 놓고 대결을 벌이는 프로그램이었다. 테니스, 탁구 등등의 다양한 생활체육을 소재로 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배드민턴으로 12회 시즌을 마감한 이 프로그램은 지금의 스포츠가 국가스포츠의 차원을 넘어 생활 속으로 들어오고 있는 그 변화를 포착했다는 점에서 의미와 가치가 있었다. 이런 점은 제목에 이미 담겨 있었다. 축구와 야구 같은 국가스포츠를 상징하는 스포츠종목이 아니라 배드민턴 같은 ‘생활스포츠’를 그것도 국가스포츠가 배출한 스타들의 도전기로 담겠다는 의지가 그 제목에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국가스포츠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건 올림픽을 바라보는 달라진 대중들의 시선에서도 느껴졌다. 우승과 메달(그것도 금메달) 그리고 순위는 국가스포츠가 내세우는 가장 강력한 유인이었다. 하지만 국가주의 시대가 저물고 국가보다는 개인의 행복이 더 중요해진 시대로 접어들면서 올림픽 같은 국가스포츠도 ‘국가적 성취’보다는 ‘개인적 성취’에 더 집중하게 됐다. 4등에 주목하고 응원하는 새로운 풍경들이 등장했다. 24년 만에 한국기록을 경신하며 2m35를 넘어 4등을 한 우상혁 선수는 활짝 웃으며 “후회는 전혀 없다”고 소감을 밝혔고, 다이빙 3m 스프링보드에서 예선12위 꼴찌로 결선에 올라 놀랍게도 한국 다이빙 역대 최고 성적을 거두며 전체 4등을 한 우하람 선수 역시 “4등 자체가 영광”이라고 했다. 수영 자유형 100m 예선에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결선에 올라 5등 성적을 낸 황선우 선수는 “만족한다. 행복하게 수영했다”고 말했고 그밖에도 역도의 이선미, 체조 마루운동의 류성현, 사격 10m 공기권총 혼성단체전의 남태윤, 권은지도 모두 4등을 했지만 만족감을 드러냈다. 이들에 대한 팬들의 반응도 달라졌다. 메달에 대한 집착을 보이지 않는 팬들은 본인들이 만족해하는 경기를 보며 아낌없는 박수를 쳐줬다. 더 이상 1등만 알아봐주는 올림픽이 아니었던 것이다.

국가스포츠나 엘리트 체육은 스포츠를 그 자체로 즐기기보다는 국가 홍보나 국위선양 같은 관점으로 활용되던 시대의 산물이다. 이영표가 뛰었던 2002년 월드컵으로 전 국민이 들썩이던 시절이 있었고, 마치 IMF 속에서도 희망을 바라보듯 메이저리거로서 박찬호의 투구 하나에 국민들이 열광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열광은 아마 앞으로도 국가적인 스포츠 이벤트에 있어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엘리트 체육의 산물로서 국가스포츠가 여전히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번 올림픽을 통해 드러난 것처럼 스포츠를 그 자체로 즐기는 생활체육에 대한 대중적인 욕망도 커지고 있다.

사실 스포츠에 있어서 축구, 야구 같은 인기스포츠와 이른바 ‘비인기종목’으로 불리는 스포츠가 나뉘는 데는 미디어의 역할이 크다. 미디어가 어떻게 조명해주느냐에 따라 그 저변이 만들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른바 ‘비인기종목’이라는 지칭을 들을 때마다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종목이 인기가 없는 게 아니라, 미디어가 주목해주지 않기 때문에 인기를 얻을 기회가 없는 게 아닌가. 하지만 지금의 대중들은 국가(혹은 미디어)가 주목시키는 스포츠에만 시선을 주지는 않는다. 만일 생활체육이 점점 더 대중들의 일상에 자리하게 된다면 이런 관점은 더 강해질 것이다. 축구, 야구 말고도 대중들이 찾는 스포츠들이 더 다양하게 미디어에 조명될 때, ‘비인기종목’이라는 이상한 지칭은 사라지지 않을까. 지금 우리의 스포츠는 새로운 변화를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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