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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이 지난 지도 20여일. 하지만 미술시장은 여전히 깊은 한랭전선 아래 가뿐 입김만 내뿜고 있다. ‘코로나19가 멈춘 국가시스템이 미술시장뿐인가’ 위로를 하려 해도 유독 뼈아픈 건 어쩔 수 없다. 지난해 뚝 떨어진 판매실적으로 이미 휘청한 탓이다. 경매시장의 타격이 컸다. 한 해 장사 결과가 1565억원. 이전 해 2194억원에 비해 무려 629억원(28.7%)이 빠진 성적표를 받았다. 국내 미술품 경매 양대산맥인 서울옥션과 케이옥션은 경매시장에서 차지하는 압도적 비중(2019년 89.27%)만큼 낙폭도 클 수밖에. 그렇게 맞은 올해다. 절치부심도 아쉬운데 바이러스까지 막아선 형국.
그래도 움직여보겠단다. 다시 찾아든 봄기운에 힘입어 ‘꿈틀’ 해보겠단다. 서울옥션과 케이옥션이 예고한 메이저경매가 그거다. 서울옥션은 ‘제155회 미술품 경매’를 24일 서울 강남구 서울옥션 강남센터 경매장에서, 케이옥션은 ‘3월 경매’를 25일 강남구 신사동 케이옥션 경매장에서 각각 열고 봄 세일에 나선다. 케이옥션은 지난 1월에 이어 두 번째, 서울옥션은 올해 처음 여는 메이저경매다.
어쨌든 조심스러운 행보다. 여느 때에 비해 두 경매사가 출품 수와 규모 등에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다. 서울옥션은 126점 100억원어치를, 케이옥션은 175점 100억원어치를 내놨다. 그럼에도 적지 않다. 24·25일 양일에 걸쳐 301점 200억원 규모의 미술시장이 오랜만에 열리는 거다. 기댈 것은 역시 ‘사람’인지, 이번 경매에서 유난히 시선을 끄는 ‘사람’도 특별하다. 서울옥션이 ‘사람과 사람 그리고 타자’란 섹션 아래 모은 사람 냄새 물씬한 회화작품들, 케이옥션에서 출품한 사람존중 사상을 바탕에 둔 서예·사진작품들. 가격에 승부를 걸기보다 안팎의 분위기를 다잡으려 한 의지가 두루 읽힌다.
△서울옥션 “사람이 힘이다”…김환기가 작정하고 그린 ‘사람’
수화 김환기(1913∼1974)가 “작정하고 그렸다”는 그림이 서울옥션 경매에 나온다. 1961년 작 ‘4월의 행진’이다. 산·강·해·달·항아리가 아니라면 점으로만 심오한 추상세계를 빼내던 그이가 ‘사람’을 그린 작품이다. 발단은 1960년 4·19혁명이었단다. 잡지 ‘사상계’가 그해 6월에 4월혁명 관련 특집을 꾸리는데 김환기가 삽화형태로 작품을 게재했던 터. 한 해 뒤 그 삽화는 유화로 제작됐다. 푸른색의 인간 군상이 붉은 꽃 떨어지는 거리를 가로지르며 ‘4월의 행진’에 나서는. 김환기 작품 중 드문 소재라 희소성까지 가진 그림은 추정가 7억∼10억원을 달고 새 주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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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옥션이 ‘사람’을 주제로 묶은 섹션 ‘사람과 사람 그리고 타자’에는 김환기 외에 고암 이응노(1904∼1989)와 서세옥(91), 오윤(1946∼1986)이 들었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단 한 번도 사람을 놓친 적이 없다는 것, 그것이 어느 개인이 아닌 ‘사람들’로 엮인 관계성을 들여다봤다는 것. 그래서 누구는 “관계의 압축이 갖는 리듬이자 힘의 사람들”이라고 표현했을 거다.
특히 이응노와 서세옥은 한지와 먹으로 사람과 사람을 엮어 강한 율동미를 만들어냈는데. 이번 경매에 나온 이응노의 ‘군상’(1987), 서세옥의 ‘사람들’(연도미상)이라면 그 대표성을 띤다고 할 터. 한지를 사용한 콜라주로 이응노가 타계 두 해 전 제작했다는 ‘군상’(1987)은 1000만∼2000만원에, 자연에 동화한 사람의 모습을 서세옥 특유의 기호화한 형태로 빼낸 ‘사람들’은 2200만∼3500만원에 출품했다.
오윤의 작품으로는 ‘춘무인추무의’(1985)가 나왔다. 35명의 춤추는 농민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 출품작은 1980년대 제작한 오윤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판화다. 풍물패 기수가 든 깃발에도 새겨넣은 ‘춘무인추무의’는 ‘봄에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게 없다’란 뜻. 농민들 몸에 박은 35가지의 전통춤사위가 흥겨운 리듬감까지 보탠 작품의 추정가는 2500만∼5000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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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옥션 “사람이 중하다”…이병철 경영철학 담은 글씨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1910∼1987) 회장은 서예를 즐긴 인물로 꼽힌다. 집무실에 늘 뒀다는 지필묵으로 경영철학을 수시로 옮겼다는데. 그 핵심이라 할 서예작품이 케이옥션 경매에 나온다. ‘인재제일(人材第一)’(1981)이다. “일생의 80%를 인재 모으고 교육하는 데 썼다”는 ‘사람경영’ ‘기업정신’의 축을 단 네 자로 응축한 것이다. 신유하(辛酉夏·신유년 여름) 호암(湖巖)이란 단출한 낙관으로 마무리한 해서체의 ‘인재제일’은 이 전 회장이 남긴 숱한 글씨 중 경매에선 처음 소개돼 화제를 모은다. 기교가 없고 군더더기도 없으며 부드러우면서 힘이 들어간 단단한 획을 특기로 삼은 글씨. 그 덕에 이 전 회장은 생전 성품을 자주 들키기도 했다는데. 과시욕이 없는 대신 고집이 세고 계획과 마무리에서 일치를 봐야 하는 성향 말이다. 이 모두를 단 한 점에 그대로 녹인 작품의 추정가는 2000만∼4000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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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경매에서 눈에 띄는 글씨 한 점이 더 있다. 고종황제(1863∼1907)의 어필 ‘독서지재성현(讀書志在聖賢)’(연도미상). ‘독서하는 것은 성현을 배우는 데에 있다’란 뜻의 문구를 ‘주자치가격언’(朱子治家格言)에서 따왔다. 중국 당나라 서예가 안진경 서풍을 수용한 조선 정조 이래의 왕실 필체를 그대로 녹인, 굵고 강한 해서체로 완성한 작품은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시절 포천군수를 지낸 한만용에게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정가 1500만원∼4000만원에 응찰자를 기다린다.
케이옥션이 이번 경매에서 특히 공을 들인 작품은 꽃그림이다. 사람의 행복을 대신 염원하는 모란을 8폭 수묵채색화로 가득 옮겨낸 ‘모란괴석도’(19세기). 화사하고 섬세한 꽃(모란)과 기이하게 생긴 돌(괴석)을 어울린 여덟 개의 장면을 모은 작품의 작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민화 등에서 가장 많이 그려졌다는 모란도 중 탁월하게 역동적이란 평가를 받았다. 한 폭에 60㎝씩 전체 가로길이가 5m에 달하는 규모도 가치를 높이는 지점. 4억 5000만원부터 호가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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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전 서울에 주재한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1876∼1948)의 ‘사람’ 사진도 있다. 7개월쯤 머물며 촬영한 95점에 손으로 쓴 목차까지 얹은 필름 ‘코레아 에 코레아네’(한국과 한국인·1902)다. 필름은 두 권으로 제작한 동명서적에 든 로제티의 사진 166점 중 일부다. 갓 수선공, 옹기장수, 빨래터 아낙네도 반갑지만 조폐국의 어린 직원들이 카메라 앞에서 잠시 포즈를 취한 장면은 유난히 아련하고 정겹다. 추정가 1200만∼2400만원을 걸고 이들을 다 품어낼 새 주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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