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가 만났습니다]①"위안부때와 다르다…외교채널 풀가동해야"

하지나 기자I 2019.07.24 05:00:00

[한일갈등 전문가 제언]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 인터뷰
“도덕적 우위에 있던 韓..대법원, 정부 입장 뒤집어"
"양국 신뢰할 수 있는 인물 통해 물밑접촉..양국 정상회담 통해 풀어야"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사진=노진환 기자)
[이데일리 하지나 기자]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맞서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에 지속적으로 외교적 협의를 촉구하는 한편, 국제사회의 전방위적인 여론전을 통해 일본의 자진 철회를 이끌어내는 전략으로 맞서고 있다. 하지만 상대는 녹록지 않고 상황은 우호적이지 않다. 일본은 대화를 거부하고 있고, 미국은 여전히 중재를 회피하고 있다.

◇달라진 국제 여론..‘사법 자제 원칙’

22일 이데일리가 만난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위안부때와는 국제 여론이 달라졌다”고 지적했다.

윤 전 원장은 “당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강제된 성노예’라는 표현을 쓰는 등 아베 정부를 압박했고, 미국 의회는 위안부 결의안까지 채택했다”면서 “결과적으로 일본 아베 총리는 결국 자신의 태도를 100% 바꾸고 보상 합의를 한 것은 국제 여론이나 미국의 입장이 상당히 반영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그동안 한·일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는 한국이 절대적으로 도덕적 우위에 있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고 봤다. 윤 전 원장은 “1965년 한일회담에서 국가 간의 조약에 의해서 위안부, 원폭 피해자, 사할린 동포는 제외됐지만 강제징용 청구권에 대한 식민지 피해 보상은 일괄적으로 해결했고, 이 부분은 사실 개인 피해자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지만 정부가 전부 가져갔다”면서 “우리 정부도 이 부분에 문제점을 인지하고 1975년 한차례 피해보상을 했다. 또 2005년 문재인-이해찬 민관공동위원회에서도 이 부분을 인정해서 6300억 원을 보상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재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장인 대법원장과 대법관 총 13명 중 11명의 다수 의견으로 1965년 청구권협정으로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윤 전 원장은 “대법원이 정부 입장을 뒤집는 판결을 한 것”이라면서 “일반적으로 사법부는 외교적 문제가 얽혀 있으면 관례상 ‘사법 자제의 원칙’이 적용된다. 또 일정 부분 행정부와 사법부의 협의 과정이 있지만 우리 사법부는 이 부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치밀했으나 한국은 안일했다”

윤 전 원장은 대법원 판결 이후 정부의 안일한 대응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윤 전 원장은 “작년 10월 대법원 판결 이후 한·일 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일본도 경고했다”면서 “하지만 사전에 예방하는 움직임은커녕 위기관리 모습도 없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대법원 판결에 대한 정부 입장과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해 이렇다 할 정부 입장 표명도 없었고, 올해 초 아소 다로 일본 재무상이 경제보복을 암시했지만 그대로 흘려보냈다”면서 “사태가 이렇게까지 온 것은 유감”이라고 했다.

윤 전 원장은 일본의 태도 변화는 아주 오래전부터 감지됐다고 했다. 그는 “일본은 치밀하게 준비해 왔다”면서 “일본 외무성에서 한일 관계를 지칭할 때 ‘자유와 민주주의, 시장경제 등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 중요한 이웃 나라’라는 표현을 썼는데 5년 전부터 ‘가장 중요한 이웃 나라’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에 대한 신뢰 악화가 단순히 이번 대법원 판결 때문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그럼에도 한일관계는 정치·외교적으로 풀어갈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윤 전 원장은 “국산 대체, 수입선 다변화, WTO 제소 등도 중요하지만 결국 통상·경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시간이 많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면서 “또 대법원 판결대로 일본 기업의 자산을 압류해서 피해자들에게 나눠줄 수 있겠지만 이후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수십만 명 소송을 제기할 것이다. 법으로 얘기하면 끝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 국민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정부는 더 이상의 감정싸움은 그만두고, 좀 더 냉정하고 치밀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위기 넘기면 제2의 김대중-오부치 선언 가능

하지만 윤 전 원장은 현재 일본과 제대로 된 외교 채널이 작동되지 않는다는 점을 언급했다. 그는 “박근혜 정부 때도 한일관계가 나빴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이홍구 전 총리, 모리 요시로 전 총리 등을 중심으로 원로들이 나서서 한일 친선 모임이나 포럼 등을 갖고 접점을 찾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면서 “지금도 충분히 그런 채널이 있지만 현 정부는 이를 활용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윤 전 원장은 “지금이라도 우리 정부가 양국 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일본에 보내서 접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궁극적으로는 양국 정상 간 만남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는 “지난 정부에는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과 야치 쇼타로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이라는 외교 안보 책사가 있었다”면서 “그런 신뢰할 수 있는 인사를 가동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러면서 그는 외교부 내 무너진 대일라인 역시 회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지금은 적폐 청산이라고 과거 일본과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좌천시키거나 대기발령 조치하는 등 인사상 불이익을 내렸다”면서 “관료가 코드가 어디 있나”고 지적했다. 외교부 내에서 정통 ‘저팬스쿨’이라고 불릴만한 인물은 조세영 1차관 정도다. 그마저도 지난 6월 일본을 비공개로 방문해 한국 기업과 일본 강제징용 책임 기업의 자발적 출연금으로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배상하자는 ‘1+1 기금’안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주일 한국대사관 경제공사는 4개월째 공석이다.

그는 다만 이번 갈등이 잘 해결되면 한일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윤 전 원장은 “대법원 판결은 결국 65년 체제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 것 아니겠나”라면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으로 일본 문화를 개방했던 1998년 한일 관계가 2.0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이번 위기를 잘 넘기면 한일 관계는 3.0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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