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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가 만났습니다]①박영석 자본硏 원장 "한국판 블랙록이 현실적"

권소현 기자I 2019.02.19 05:30:00

지난 10년간 증권사 몸집 커졌지만
글로벌 IB보다 여전히 자본·정보 달려
한국판 골드만삭스 육성 '비현실적'
자산운용업, 국가가 전략적으로 키우면
블랙록 같은 글로벌 플레이어 나올 것

박영석 자본시장연구원장은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 빌딩에서 이데일리와 인터뷰를 통해 “고령화 추세에 자산운용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만큼 투자은행보다 자산운용사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에 유리하다”고 강조했다. [사진=신태현 기자]
[이데일리 권소현 기자] “‘한국판 골드만삭스’는 사실 단어 자체가 비현실적입니다. ‘한국판 블랙록’을 만드는 게 빠를 겁니다”

지난 2009년 2월 자본시장통합법을 도입한 시기부터 금융당국은 줄곧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만들자’는 구호를 외쳐왔다. 골드만삭스는 자기자본 100조원대로 전세계 투자은행 중 1위니 우리도 이같은 글로벌 플레이어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통법 도입 10년이 지난 현재 국내 1위인 미래에셋대우증권의 자기자본 규모는 8조원 수준에 불과하다.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자본시장연구원에서 만난 박영석 자본시장연구원장은 “증권회사를 골드만삭스처럼 키우는 것보다는 자산운용업에서 블랙록 같은 글로벌 1위 운용사에 걸맞은 수준으로 키우는 것이 쉽지 않겠나”라며 “저출산 고령화 트렌드로 인해 자산축적이 빠르게 이뤄지고 있는데 이같은 흐름을 타고 국가가 전략적으로 자산운용업을 키우면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저성장·고령화…운용업이 더 빨리 클 수 있는 환경

박 원장은 자본시장통합법이 자본시장이나 금융투자업계의 외적인 성장에는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도입 취지나 원칙을 떠올리면 충분한 효과를 얻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증권사의 자본금도 커지고 대형화되긴 했지만 자본시장 본연의 역할인 혁신자금 공급이나 글로벌 플레이어로서의 위상을 갖추는 데 있어서는 기대에 못 미쳤다는 것이다.

일단 외형에서 글로벌 투자은행과는 아직 차이가 크다. 사실 영미계 투자은행뿐 아니라 일본의 노무라증권, 중국의 중신증권도 자기자본 규모가 20조가 넘는데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 증권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박 원장은 비단 자본 규모에서만 달리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박 원장은 “자본과 정보를 같이 갖고 있어야 글로벌 IB가 될 수 있는데 그들만의 네트워크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며 “글로벌 금융시장이 유대인 등 몇몇 그룹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에서 아무리 짧은 기간 내에 자본을 늘리고 덩치를 키워도 골드만삭스 정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위치까지 가긴 어렵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자산운용은 다르다. 한국 경제가 저성장·저금리 구조로 가고 있고 빠르게 고령화되면서 은행 예금금리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안겨줄 금융상품에 대한 수요는 커지고 있다. 박 원장은 “노후 대비 투자금이 쌓이는데 이 자금 상당 부분이 주식이나 채권 등 자본시장으로 흘러들어 간다”며 “자산운용업을 통해 국내외 좋은 수익을 올리는 상품을 찾다보면 자산운용업이 훨씬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고령화라는 강한 바람이 불고 있는데, 지금은 국내 자산운용사들의 실력이 글로벌 수준에 못 미치기 때문에 상당 부분 글로벌 자산운용사가 누리고 있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정부가 자산운용업을 전략산업으로 키운다면 충분히 ‘한국판 블랙록’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블랙록은 지난해 기준 운용자산 약 6조 달러(약 6777조원)에 달해 글로벌 최대 운용사로 꼽힌다. 금융에서의 ‘삼성전자’를 만든다면 은행도, 증권사도 아닌 자산운용사가 더 가능성 있다는 것.

그동안 자산운용업이 더 크지 못한 이유로는 판매채널 문제를 꼽았다. 주로 은행이나 증권사를 통해 펀드를 판매하다 보니 투자자의 수익률보다는 판매사에게 수수료가 더 떨어지는 상품 위주로 권하게 되고, 잦은 환매를 유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박 원장은 “주식형 펀드에서 고위험 고수익이라는 투자원칙이 적용되려면 적어도 5년에서 10년 정도의 장기투자가 전제돼야 하는데 판매사 이익이나 직원의 인센티브가 먼저가 되다 보니 단기 투자해 펀드에서 손실을 경험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결국 주식형 펀드를 외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며 “운용사들은 다양한 상품을 만들어내도 고객에게 선택을 못 받으니 단기 상품 위주로 만들어내는 악순환이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판매 채널에서 장기투자를 하면 더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권장하는 인센티브 구조를 만들어야 자산운용업이 발전하고 고객 수익도 높아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의 임기가 지나치게 짧다는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고객 수익률과 회사의 인센티브가 같이 가야 하는데 CEO 입장에서는 짧은 임기 내에 성과를 내야 하니 단기 상품 위주로 추천하고 수수료 수익을 올리는 방향으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그런 면에서 NH투자증권의 핵심성과지표(KPI) 폐지 결정은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박 원장은 평가했다.

박영석 자본시장연구원장이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 빌딩에서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신태현 기자]
◇복잡하고 다양한 증권사 업무…규제 풀어 운신의 폭 넓혀줘야

판매 채널로서의 증권사의 역할 뿐 아니라 자본공급 주체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결국 규제를 완화해 운신의 폭을 넓혀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원장은 “소비자보호에 크게 문제가 되거나 법을 위반할 경우에만 엄하게 일벌백계하고 기본적인 규제는 좀 더 완화해야 한다”며 “자본시장은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에 규제를 없애줘야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새로운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설령 증권사 한 곳이 부실화되더라도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은행에 비해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점 역시 규제 수준을 낮춰도 되는 이유로 꼽았다. 은행이 부실해지면 5000만원까지만 예금보호가 되고 공적자금 등 혈세투입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증권사를 통해 투자한 펀드나 주식, 예탁금 등은 운용사, 예탁원, 증권금융 등에서 관리하고 있어 금융소비자에 큰 타격이 없을 것이란 설명이다.

규제 완화를 위해서는 사회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융사고가 터지거나 금융기관 부실이 발생하면 무조건 금융당국의 관리감독 부실로 몰아가는 경향이 크다는 게 문제라는 지적이다. 박 원장은 “개별 금융기관 부실은 금융사가 경영을 잘못해서 발생한 것이지 감독이나 규제의 실패가 아니다”라며 “모든 금융사들이 건전하게 운영돼야 하고 임기 내에 부실이나 사고가 터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금융당국뿐 아니라 사회구성원도 공통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규제 완화를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영석 자본시장연구원장은…△1960년생 △1979년 한성고 졸업 △1985년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1990년 미국 펜실베니아대 경영학 석·박사 △1990~1993년 일본 국제대 조교수 △1993~1995년 일본 릿쿄대 교수 △1995~1998 동국대 교수 △1998년 서강대 교수 △2016년 한국증권학회장 △2017년 한국금융학회장 △2018년 3월 공적자금위원회 민간위원장 △2018년 6월 자본시장연구원 원장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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