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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직후 국내에는 창업 붐이 불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나 구인회 LG 창업주, 이원만 코오롱 창업주도 모두 이때 사업을 시작했다. 정 명예회장만이 무일푼이었다.
그의 유일한 자산은 농사꾼 출신의 성실함과 이를 바탕으로 한 신뢰였다. 신뢰 하나로 쌀가게를 물려받았고 이곳 단골손님에게 돈을 빌려 현대그룹의 모태인 아도서비스를 설립했다. 그의 나이 25세 때인 1940년이었다.
그는 이 같은 신뢰에 한번 뛰어든 일에 전력투구하는 불굴의 의지,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을 더했다.
그의 인생 여정을 되짚어 보면 성공할 때보단 시련을 겪을 때가 많았다. 성공의 역사라기보다는 시련을 극복한 역사를 만들었다. 그의 대표적인 경영 철학이 ‘시련은 있으나 실패는 없다’이기도 하다. 네 번을 가출할 때도 세 번을 실패했고 아도서비스를 세운 지 며칠 만에 불이 났다.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울 때 즈음 일제의 태평양전쟁 개전으로 이를 다시 접어야 했다.
1950년 1월 세운 현대건설도 시작부터 난관의 연속이었다. 5개월 만에 전쟁이 났고 전후 고령교 복구 작업 땐 1년 사이에 물가가 120배 뛰면서 공사금액 이상의 빚을 지기도 했다. 그 역시 생전 이맘때는 절망적이었다고 회고했을 정도다.
그는 그때마다 기지를 발휘해 시련을 극복했다. 겨울철 전쟁통에 UN군 묘지 정비를 맡아 잔디 대신 어린 보리를 옮겨 심는다든지, 천문학적인 빚을 지더라도 공사를 끝까지 마무리한 신용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는 식이었다.
도전은 이어졌다. 토목 회사로 자리를 잡아가던 1970년대 경험과 자본, 기술이 일천했던 조선사업을 시작했고, 숱한 반대에도 포드자동차와 결별하고 독자 자동차 개발에 나서 첫 국산차로 꼽히는 ‘포니’를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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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서전에서 “나는 상식에 얽매인 고정관념의 테두리 속에 갇힌 사람에게는 아무런 창의력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내가 믿는 건 굳센 의지와 잠재능력, 창의성, 우리 민족의 엄청난 에너지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생애 마지막까지 ‘벤처 정신’을 잊지 않았다. 1992년 78세의 적잖은 나이에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대권에 도전했고 낙선 이후 정치적 탄압 속에서도 대북 사업에 뛰어들었다. 1998년 500마리의 소떼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으로 갔다. 그는 작고하기 두 해 전인 1999년 84세 때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아직 은퇴하긴 젊다”며 “120세까지 살면서 대북사업과 통신사업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건강이 악화된 2000년 6월 북한에 가서 김정일 위원장을 면담했다.
2001년 3월 21일. 정 명예회장은 청운동 자택 앞뜰에서 쉬다가 73세의 집사에게 “너는 나이도 어리면서 왜 그렇게 머리가 허연가”라는 농담하며 껄껄 웃었다. 외부에 알려진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소탈했다. 재계란 말을 싫어하고 스스로를 ‘돈 많은 노동자’로 불렀다. 회장이 된 이후에도 신입사원 수련대회에 가서 씨름했고 영업직원과 노래방에서 술에 취해 노래를 불렀다. 극심한 노사갈등 때 노조와 얘기하겠다며 노조사무실로 찾아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젊은 창업가가 아이디어 하나로 창업하고, 또 성공하고 있다. 국가가 우리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선 시련을 겪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제2의 정주영’이 클 기회를 만들어줘야 한다. 청년에게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키워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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