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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밖으로 나온 집밥②] 저녁 7시 집밥의 두 풍경

양승준 기자I 2014.03.29 08:09:00

아현동쓰리룸·홍대 월요식당 탐방
외국인·직장인·자취생 10~20명
한끼 밥상 나누며 친분 쌓고
요리 만들며 소통의 대화
"허전함 버리려 옵니다"

서툴고 불편한 것도 모두 웃음이 되는 자리. ‘아현동쓰리룸’에서는 집밥을 먹으며 사랑을 배운다(사진=한대욱 기자 doorim)


[이데일리 양승준·이윤정 기자] 만남의 장소가 집이고 목적이 밥이다. 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 원장은 “친한 사람끼리 밥을 먹기도 하지만 반대로 서먹한 사람들도 밥을 먹어야 친해진다”며 “밥이란 편안한 매개체와 솔직하게 사람을 대할 수 있는 집이란 공간에서 이뤄지는 집밥 모임은 더 적극적인 관계 욕망”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전문가의 의견. 생판 모르는 사람끼리 밥을 먹기 위해 모인다는 게 쉬운 일인가. 분위기는 어떨까. 밥을 먹으며 무슨 얘길 하는 걸까. 궁금증이 쏟아졌다. 그래서 ‘집밥’ 사이트에서 인기리에 운영되고 있는 두 곳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집에서 밥을 만들어 먹는 모임(‘아현동쓰리룸’)과 카페에서 격식을 갖춰 요리(‘홍대 월요식당’)를 하는 모임. 목적은 같지만 환경과 분위기가 서로 대비돼 현대사회에서 변화된 식사문화를 보여줄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관건은 모임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참여하는 것. ‘아현동쓰리룸’에는 기자 신분을 밝히지 않고 잠입취재를 했다. 대신 ‘홍대 월요식당’에서는 평소 요리를 즐긴다는 기자가 떳떳이 자신을 드러내고 낯선 사람들 앞에서 칼을 잡았다.

▲아현동쓰리룸 “양푼에 비벼 먹을까요?”

풍화된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선 서울 아현동 635번지. 허름한 슈퍼를 지나 좁은 골목 초입. ‘아현동쓰리룸’이라고 적힌 종이 한 장이 나침반이 됐다. 어둠 속 종이를 따라 계단으로 올라간 곳은 2층 한 가정집.

“어서 오세요.” 지난 13일 오후 7시20분. 약속시간 10분 전이다. “밥 먹으러 왔어요.” 어색함을 감추려 기자가 너스레를 떨자 집주인인 천휘재(29) 씨가 웃음으로 받는다. “계란 부치면 되죠?” 대사관에서 일한다는 이모(40) 씨가 팔을 걷어붙이고 부엌에 자리를 틀었다. 이씨도 이날 밥 먹으러 온 손님이다. “처음 왔다”며 웃었다. 이날 메뉴는 비빔밥과 된장국. 부엌은 재료 볶는 소리로 시끌벅적하다. 이 집에는 세 청년이 산다. 이날 밥상은 그 청년 중 천씨와 김산(29) 씨, 그들의 여자 친구들이 힘을 보태 차리는 밥상이다.

오후 7시30분. 10여명이 밥을 먹기 위해 모였다. 66㎡(20평)가 채 안 되는 공간에 주인을 포함해 15명이 밥을 먹기 위해 모였다. 필요한 건 밥상. 식탁은 사치다. 집주인이 방에서 다리 없는 긴 베니어합판을 들고 나왔다. 두툼한 대학서적은 밥상다리가 됐다.

오후 7시50분. 밥이 발목을 잡았다. 설익었다. 밥통에 쌀을 너무 많이 넣은 탓이다. “죄송해요, 배고프시죠?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천씨가 급하게 나가더니 소주 한 병을 들고 들어왔다. 소주를 그대로 밥통에 들이붓고 다시 10분. 생쌀 같던 밥이 제대로 익었다. “우와.” 이곳저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양푼에 비벼 먹을까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너도나도 큰 양푼에 밥을 넣어 숟가락을 섞었다. 밥그릇이 모자라 컵에 담아주기도 했다.

서툴고 불편한 것도 모두 웃음이 되는 자리. 불평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이들은 서로 밥을 먹으며 거리를 좁혀갔다. 신경정신과 간호사부터 자영업자, 출판사 직원, 대학생, 원단공장직원까지 직종이 다른 이들이 모여 경험을 공유했다. “프랑스 유학 생활 어땠나요?” “신경정신과면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많겠네요” 등. 간혹 외국인이 참석하기도 한다. 한국어를 배우러 왔다는 독일인 티나 씨는 “친구 소개로 왔는데 정말 즐거웠다”며 “베를린에서는 겪어보지 못했던 문화라 흥미로웠다”고 새로운 느낌을 전했다.

“나도 결혼 전 자취생활했을 때 이 모임 알았으면 왔을 것 같다.” ‘아현동쓰리룸’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사진기자가 속에 담아뒀던 옛 외로움을 꺼냈다(사진=한대욱 기자 doorim@).


식사가 끝난 오후 9시. 이후 한 시간여 동안에는 작은 콘서트가 열렸다. “8년 동안 혼자 살았는데 돌이켜보니 8년 동안 집에 들어와 ‘다녀왔습니다’란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더라고요.” 이날 공연을 한 인디뮤지션 임우진이 던진 말에 여럿이 고개를 끄덕인다. 모임 끝엔 가벼운 술자리가 이어지기도 한다.

낯선 사람의 집을 찾아가 밥을 먹는 게 흔한 풍경은 아니다. 참석자 대부분은 ‘싱글족’이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홀로 사는 이가 많았다. 외로움을 달래려고 온 사람들이다. 15년 전 서울에서 올라왔다는 이준호(45) 씨는 “객지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리움이 있다”며 “여기서 밥을 먹고 가면 한 주 동안 쌓였던 허전함이 다 메워지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자취한 지 10년이 됐다는 이혜민(31) 씨는 “혼자 밥 먹다가 짜증이 나 숟가락을 던진 적이 있다”며 “이렇게 같이 밥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좋아 참석하게 됐다”며 웃었다.

외로운 이들만 집밥 모임을 찾는 건 아니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 모임을 찾는 이들도 있다. 정은화(23) 씨는 “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외롭지도 않다”며 “하지만 학생이라 인간관계가 편중돼 이런 모임을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고 했다.

이 모임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천씨는 “마을공동체 작업을 하다 일 끝내고 우리집에서 함께 밥을 먹었는데 그 분위기가 정말 좋아 잊을 수 없었다”며 “이를 계기로 집밥모임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일이다.

▲홍대 월요식당 “모여서 먹으니까 더 맛있어요”

지난 22일 서울 합정동의 한 카페 라운지. 셰프의 설명에 따라 요리수업이 이뤄졌다. “자, 이제 유부를 얹어볼게요. 큰 게 좋다고 해서 통째로 넣으면 먹다 데일 수 있어요. 오늘은 삼각형으로 썰어볼게요.”

이날 담당은 김지양 씨. 알배추와 얇게 썬 돼지불고기감, 새송이버섯과 곤약 등이 주재료다. “고기가 보시는 것처럼 아주 얇아요. 두 장이 겹쳐서 들어가면 나중에 질겨서 맛이 없으니까 잘 펼쳐서 넣어주세요.” 셰프가 시범을 보이자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스마트폰과 메모장을 이용해 꼼꼼하게 적는 이들도 눈에 띈다. “끓이면 다 퍼지지 않아요?” “배추가 잡아주는 역할을 하니까 괜찮아요.”

“채소는 제가 썰게요.” ‘홍대 월요식당’에 모인 사람들은 함께 음식을 만들며 자연스레 친분을 쌓는다(사진=방인권 기자 bink7119@).


20여명이 오순도순 모여 요리를 배우는 이곳은 ‘홍대 월요식당’.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고 즐기는 소셜다이닝 프로그램으로 매주 두 번 셰프가 다양한 레시피를 주제에 따라 선보인다. 인기메뉴가 오픈되는 날이면 몇시간 만에 신청이 마감될 정도로 인기가 좋다. 이날의 메뉴는 ‘밀푀유 전골’. 요리를 하고 남은 고기와 버섯은 ‘팽이버섯 고기말이’로 활용했다.

설명이 끝나고 4~5명으로 조를 나눠 셰프의 요리를 따라해 보는 시간. 이날 서로를 처음 본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자연스럽게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저는 곤약 썰게요.” “야채는 이렇게 올려놓으면 되죠?” 서로 물어보고 답하며 자연스럽게 대화도 오고간다. 남편과 함께 오늘 처음 모임에 참석했다는 회사원 황연숙(35) 씨는 “직접 음식을 만드는지 모르고 왔는데 특별한 경험”이라며 “앞으로 종종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살다가 왔다는 알렉스(29) 씨는 “미국에 있을 땐 이런 모임에 참여해본 적이 없다”며 “요리를 못하는데 직접 보면서 배우니 쉽고 재밌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요리가 끝나면 다함께 모여 식사하는 시간이 마련된다. 조를 나눠 요리를 했던 사람들이 테이블을 중앙에 모아놓고 담소를 나누며 함께 음식을 먹는다. 회사원 고재광(30) 씨는 “함께 모여 식사를 하니 정말 좋다”며 “또 오고 싶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회사원 정주영(30) 씨는 “처음엔 데면데면하던 사람들이 편하게 이야기하면서 식사를 한다는 게 신기하다“며 “아무래도 함께 음식을 만들어서 더 빨리 친해지는 것 같다”며 웃었다.

남편과 함께 처음으로 ‘홍대 월요식당’을 찾은 직장인 황연숙(35)씨가 ‘팽이버섯 고기말이’를 직접 만들어보고 있다(사진=방인권 기자 bink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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