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으차차차차차.” 한 사내가 무대 위에서 신발을 벗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다. “디디 나 좀 도와줘.” 뒤늦게 등장한 고고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하나, 둘, 셋!” 실패다. 고고는 다시 한번 디디의 신발을 붙들었다. “하나, 둘, 셋! 으차차차차.” 벗겨진 신발에 코를 들이댄 고고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관객들의 웃음이 터져 나온다.
장애인극단 애인이 무대에 올린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 장면이다. 어색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올해로 4번째 무대에 서는 이들의 표정도 자신감에 차 있다. “생각해! 이 돼지야. 춤춰! 이 돼지야.” 하인 럭키에게 명령하는 포조의 목소리가 조그마한 소극장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휠체어를 탄 포조는 몸이 아닌 목소리로 객석을 압도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196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 출신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어느 시골 길에서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는 이야기를 그렸다. 언제부터 왜 기다리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고도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실재와 허구를 오가는 인간의 희망을 순수하게 재조명한다.
극단 애인의 연극은 ‘에이블 아트(able art)’로 일궈낸 작품이다. 에이블 아트란 가능성의 예술을 의미한다.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지체·뇌병변 장애 등을 앓고 있지만 장애인의 시선으로 작품을 보고 표현하는 데 중점을 뒀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일반공연 시간은 2시간 30분. 극단 애인의 공연은 1시간 10분 가량으로 줄였다. 출연배우들을 배려해서다. 대사도 연습과정에서 일부 수정을 거쳤다. 직접 말을 해보고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는 쉬운 단어로 대체하는 식이다.
그렇다고 특별한 준비가 더 필요한 건 아니다. 일반공연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극단 내 배우들의 장·단점을 고려해 배역을 정하고, 마땅한 출연자가 없는 경우 공개 오디션을 실시하기도 한다. 1주일 5회, 하루 4시간씩 연출자와 배우들이 함께 모여 대화를 나누며 연습을 한다. 상대방과의 호흡을 맞춰본 후 재구성 작업도 이뤄진다. 레퍼토리도 정해진 게 없다. 다만 활동성이 큰 무대는 지양하는 편이다.
극단 애인의 공연이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오랜 연습기간에 있다. 초연작의 경우 연습기간은 6개월 가량. 일반공연의 2~3배가 소요된다. 이연주 연출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느끼는 정서적인 진정성은 같다”며 “원작내용에 크게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우리 식으로 표현해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매년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연극·음악회·콘서트 등 장애인들이 직접 올리는 다양한 행사가 전국 곳곳에서 펼쳐진다. 현재 장애인들로 구성돼 활동 중인 극단은 애인 외에 ‘휠’ ‘판’ 등을 포함해 4개 정도. 아직 그 수가 많지는 않다. 장애인의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에이블아트 센터의 김보라 공연예술팀장은 “예술을 통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측면에서 장애인공연은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다”며 “앞으로 더 많은 장애인이 참여할 수 있는 대중적인 공연이 활성화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20일까지 서울 명륜동 선돌극장에서 공연된다. 02-747-3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