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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랜드 사태는 지난 9월 말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강원도 춘천시 중도동 레고랜드 테마파크의 시행사인 강원중도개발공사의 회생 절차를 신청하겠다고 밝히며 촉발됐습니다. 채권 시장은 강원도가 2050억 원 규모의 강원중도개발공사 발행 ABCP에 대한 지급 보증을 철회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실제 중도개발공사가 자금 조달을 위해 설립한 특수목적법인인 ‘아이원제일차’는 일주일 뒤 부도 처리됐습니다.
이 문제는 비단 한 광역 지방자치단체와 채권자 간 분쟁으로 끝나지 않고 이후 엄청난 ‘나비 효과’를 불러오게 됩니다. 지방채는 국공채의 하나로 사실상 무위험 채권으로 분류되는데, 이 같은 지방채마저도 돈을 떼일 가능성이 생긴 것이니 시장의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소위 신용도가 최상급인 고객에게 돈을 떼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기 시작한 채권자들이 신용도가 낮은 고객들에게 돈을 빌려 줄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이 때문에 기업들은 채권 시장에서 돈 빌리가 어려워졌습니다. 레고랜드 사태 이후 신용등급이 AAA로 최상인 한국전력채권(한전채)마저도 투자자를 채우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는 등 채권 시장 전반에 걸쳐 자금 경색이 확산됐습니다. 신용등급이 높은 기업이라도 채권 금리를 예전보다 훨씬 더 높게 제공해야 하고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의 경우 아예 발행을 시도해 볼 수조차 없는 상태인, 이른바 돈줄이 마르는 ‘돈맥경화’ 현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죠.
이 같은 자금 경색은 기업들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여신전문금융회사(카드·캐피털사)들이 자금 조달을 위해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여신전문금융채(여전채) 금리 역시 급등하는 등 2금융권의 조달 비용 역시 치솟았습니다. 기준금리 지속 상승 국면에서 레고랜드 사태로 인한 채권 시장 경색이라는 이중고를 겪게 된 것이죠.
2금융권의 조달 비용 급증은 또 다른 문제를 낳기도 합니다. 바로 저신용자들을 대출 절벽으로 내몰게 되는 것인데요. 우리나라는 지난해 7월 법정 최고금리를 연 20%로 낮춰 금융회사 대출과 10만 원 이상 사인 간 금전 거래에서 연 20% 이상의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하고 있는데, 조달 비용이 껑충 뛰자 2금융권이 저신용자들에 대한 대출부터 자르기 때문입니다. 이미 저신용자들에겐 20%에 가까운 금리를 받고서 대출을 해 오던 상황에서 조달 비용이 증가한 만큼 대출금리도 올려 받아야 하지만, 법정 최고금리에 막혀 20% 이상은 받지 못하니 아예 대출을 내어 주지 않게 되는 것이죠. 결국 저신용자들은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 불법 사금융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강원도가 지난달 말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다음달 15일까지 2050억 원 보증 채무 전액 상환 방침을 밝혔지만 한 번 무너진 시장의 신뢰는 단기간에 쉽사리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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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으로 ‘레고랜드 사태’로 인한 충격이 여전한 상태에서 이달 초 흥국생명과 DB생명의 연이은 콜옵션(조기상환권) 미행사 논란으로 자금 시장 경색 국면은 가중됐습니다. 사실 콜옵션 미행사는 권리의 문제로 평소 같았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인데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도 있듯이 레고랜드 사태로 인한 후유증이 여전한 상태에서 터진 생보사들의 콜옵션 미행사는 시장에 부정적 시그널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금융당국의 미숙하고 안일한 대응도 도마에 올랐는데요. 금융당국은 흥국생명이 콜옵션 미행사를 발표한 지난 1일 “합리적 선택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현재의 비정상적인 높은 금리 탓에 실리를 택했던 흥국생명은 국내 금융사들의 외화 표시 채권 가격이 급락하는 등 시장 혼란이 커지자 지난 7일, 기존 입장을 번복하고 “2017년 11월 발행한 5억 달러 규모의 해외 신종자본증권에 대한 콜옵션을 행사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금융당국이 뒤늦게 개입해 시중은행들에 흥국생명이 차환을 위해 발행하는 채권을 매입해 달라고 요청하는 등의 방법으로 시장의 급한 불은 끄는 그림이 나왔습니다.
레고랜드 및 흥국생명 사태에서 금융당국의 손에 이끌려 반강제적 구원 투수로 등판한 이들도 있는데요. 그들은 바로 시중은행들입니다. 올해 글로벌 긴축 기조에 따른 기준금리 급등에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며 ‘이자 장사’ 비판을 받아 온 시중은행들은 자신들의 관리·감독 기관인 금융당국의 요청을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시중은행 안팎에서는 자신들이 현재와 같은 온갖 자금 시장 악재의 뒤치다꺼리를 죄다 해야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터져 나오고도 있습니다.
여러 비판에도 현재 금융당국이 자금 시장의 돈맥을 뚫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요. 금융권 일각에서는 이 같은 금융당국의 노력 외에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기존 조치에 더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이와 관련 신용상 한국금융연구원 금융리스크센터장은 “한국은행이 기업유동성지원기구(SPV)를 가동해 낮은 신용도의 2금융권 채권들을 사 주는 방식 등을 통해 시장에 새로운 자금을 투입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며 “그런 채널들을 사전적으로 좀 확보해 둘 시점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