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위원 리뷰
우란문화재단 연극 ''인형들의 집''
인간 보편 문제에 귀 기울일 수 있게 화두 던져
| 연극 ‘인형들의 집’의 한 장면. (사진=우란문화재단) |
|
[황승경 공연평론가] 페미니즘 예술의 첫 신호탄이었던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은 희곡으로 출간되자마자 전 세계를 격렬한 논쟁의 장으로 내몰았다. 1879년 덴마크 코펜하겐 왕립극장에서 ‘인형의 집’이 초연되며 그동안 상이한 역사적 조건으로 길들여졌던 여성해방의 열망이 극적 사유로 치환되기 시작했다. 자아를 옭아매는 시대별 규범, 법률, 구조, 관계 속 노라의 변화에 주목한 관객들은 여성해방에 대한 각성과 맥락을 수용해 젠더정치학적 사회담론을 소환했다. 우리나라만 해도 1920년에 ‘인형의 집’ 첫 번역본이 소개된 이래, 수많은 프로덕션으로 공연되며 페미니즘의 발자취와 그 궤적을 같이 했고 가출을 감행한 노라의 후일담을 담은 속편형식의 작품도 줄이어 창작됐다. 우란문화재단은 19세기 시공간을 2020년 대한민국 서울로 옮겨 고전의 의미와 가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인형들의 집’을 16일부터 오는 27일까지 무대에 올린다. ‘인형들의 집’은 편견과 고정관념에 매몰된 현대인의 망상을 입센의 치밀하고 탄탄한 집약구성으로 구현시킨다.
노라(임강희)는 인스타그램 팔로어 60만명을 거느린 인플루언서이자 성공한 온라인 의류 쇼핑몰의 대표로 ‘완판의 여왕’으로 불린다. 학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학창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총장취임을 눈앞에 둔 남편 인국(원작의 헬메르, 이석준)과 고등학생 아들을 두고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꾸린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SNS에 노출시키는 노라는 현대사회 문화 권력의 툴에 갇혀 숨 쉴 틈조차 없다. 150년 동안 ‘노라’는 교육성취도, 경제활동기회, 정치권한부여 등 여성의 사회적 위상을 수면위로 끌어올린 공적 아이콘이었지만, 해방된 노라의 현실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았다. 중국의 대표적 근대작가 노신조차 여성에게 경제적 자립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노라는 결국 ‘인형’이 될 수밖에 없다고 역설할 정도였다. 연출자 우현주는 각색을 통해 노라가 스스로 경제적 불안정과 정서적 불안을 모두 해결하며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게 만들어 관객이 전형적인 노라에서 벗어나 인간 보편적인 문제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화두를 던졌다. 궁극적으로 ‘인형들의 집’은 억압에 대한 ‘순응과 저항’이라는 이분법칙에서 벗어난 인간의 주체적인 수행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천장의 화면을 이용한 전방위적 영상기법으로 원작의 린데부인(김정민), 크로그스타그(장석환), 랑크박사(하성광)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노출시켜 인간 실존문제에 다층적으로 다가간다.
다만 문제는 음악이다. ‘인형들의 집’ 무대에는 마치 노라의 테마처럼 작곡자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초연 1881)에 나오는 인형 올림피아의 아리아 ‘숲속의 새’가 울려 퍼지고 오페라 ‘나비부인’(초연 1904)의 허밍코러스 선율도 들린다. 연극에서 좋은 선율은 청각적 메타포와 연극적 미장센이 될 수도 있지만 여기에 등장한 오페라 음악은 연출자의 재해석 의도를 역행하고 있다. 태엽을 감아야만 춤과 노래를 부르는 수동적인 올림피아는 오페라 속에서 ‘숲속의 새’를 부르며 고장나 급기야 산산조각 부서지고, 허밍코러스의 주인공 나비부인은 작품 말미에 아들과 집안의 명예를 위해 자결한다. 더구나 콘서트 실황버전 음원을 공연에 사용해, 콘서트 관객의 웃음소리까지 고스란히 무대에 퍼져 연극 관객의 몰입을 저해시켰다. 그럼에도 ‘인형들의 집’의 참신한 작품적 시도와 감각적 연출은 단연 돋보인다. 노라의 도약, 자립, 성취, 갈등, 좌절, 해결, 절망, 희망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동시대 대한민국의 허상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 연극 ‘인형들의 집’의 한 장면. (사진=우란문화재단) |
|
| 연극 ‘인형들의 집’의 한 장면. (사진=우란문화재단) |
|